묵상자료 6634호(2019. 7. 16. 화요일).
시편 22:29-31.
찬송 36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장 마리 귀스타프 르끌레지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인인 그는 서울을 한번 방문한 뒤에, 한국에 반했지요. 그래서 독학으로 한글을 배우고, 한국의 대학에 와서 한 학기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글로 소설도 썼습니다. 그 소설이 바로 <빛나>입니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그 소설의 주인공인 빛나는 19살입니다. 전라도에서 자라다 혼자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이제 그 낯선 도시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걸 깨닫지요. 그건 두려움이기도 하고 셀레임이기도 했습니다. 3월입니다. 3월엔 빛나처럼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들의 새로운 일상 역시 두려움과 설레임 사이를 오가겠지요. 그런데 프랑스에서 온 작가에게 서울이 제2의 고향이 됐듯이, 새로운 터전에서의 일상이 두려움보다는 설레임과 빛나로 가득한 일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프랑스 작가인 르끌레지오의 한 마디,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한 마디에 물들어 봅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19. 3. 9. 방송>
2.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20-26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말에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일본 중국 태국 등 아시아권만 아니라,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스웨덴 등 유럽 권에서도 폭넓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말 속에 뼈가 들어 있다는 뜻인데, 무슨 말이든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질문은 신중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취급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질문의 속내를 지적하는 말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서는 “그 외식함을 아시고”, 마태복음서는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그리고 본문은 “그 간계를 아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가이사는 당시의 로마 총독으로 당연히 세금을 그에게 바쳐야 했고 실제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함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치라든지, 바치지 말라든지 하는 대답이 나올 수 있는데, 둘 다 모두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적당히 얼버무릴 방법이 없는 진퇴양난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정공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이사의 화상이 있으니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한 마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현실 너머의 궁극적인 문제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란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 총독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현실파와 로마 총독에게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현실 타파를 외치는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그 두 파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상황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관심에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손에 들려진 동전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얼마나 상쾌하고 유쾌하며 통쾌한 대답이며, 깊이 새길 말씀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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