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725호(2019. 10. 15 화요일)
시편 40:4-7.
찬송 3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강단(剛斷),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강단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굳세고 꿋꿋하게 견뎌내는 힘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강단이 가장 세야 할 사람들은 예술가들입니다. 그들처럼 흐름에 뒤쳐진다고 비난받고, 앞서 나간다고 오해받는 사람들도 드무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강단이 참 셌던 사람이자 그 덕을 참 많이 본 사람입니다. 리히텐슈타인은 화가가 된 후로 내내 추상주의나 표현주의라는 정통예술을 바탕으로 하는 그림만 그렸지요. 그리고 첫 번째 개인전에, 가장 쓸모없는 화가라는 언론의 혹독한 공격까지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강단 있게 굳세게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그는 그 혹독한 언론의 공격 때문에 그의 화풍을 바꾼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린 아이들의 말 한 마디에 팜 아트로 방향을 틀었지요. 그런 다음 1년만인 1962년 뉴욕에서 연 전시는 대 성공 대 성황이었습니다. 전시회를 열기도 전에 이미 모든 그림이 판매됐을 정도였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만화 같은 팝 아트의 대중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여전히 굳세게 꿋꿋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대중적인 소재로 팝 아트를 현대 미술의 대세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가 무조건 대중성이나 상업성에만 추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쾅> 같은 그림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폭력성이나 전쟁 분위기를 풍자하기도 했지요. 그 그림은 만화 전쟁에 동원된 모든 미국 남자들에게서 가져온 그림이었습니다. 그렇게 상업적인 그림 속에서도 풍자 정신도 잃지 않으면서, 팝 아트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리히텐슈타인에게 가장 큰 힘은, 강단 있는 마음에서 오는 굳센 자기 확신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그림은 마음의 강력함을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19. 3. 21. 방송>
2. 우유부단(優柔不斷)하고 유약한 왕 바알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포도원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예언자 엘리야를 만난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 명령은 준엄하고 추상같은 것이었습니다. “네가 사람을 죽이고 그의 땅마저 빼앗았구나. 이것은 야훼의 말이다.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합의 가문에 속한 남자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씨도 없이 죽으리라고 말입니다. 아합의 죄는 단순히 나봇의 포도원을 뺏기 위해서 나봇을 살해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눈에 거슬려하며, 마음에 분노를 일게 하는 우상숭배를 장려한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합과 이세벨은 우상숭배자들의 표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과 비교한다면 성황당이나 당산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음력 절기마다 치르는 민속을 가장한 각종 우상 숭배행사도 거의 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더욱 흥해진 것이라면 고사(告祀)를 지내는 모습입니다. TV에서도 권장하듯 성행중입니다. 우상숭배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며 누구냐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제1순위에 우리는 우선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당집이 줄어들고 성황당이 없어졌다고 우상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종 우상들은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무서운 저주의 말씀을 들은 아합은 화려한 왕의 복장을 찢고 오히려 굵은 베옷을 입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합니다. 전형적인 회개하는 사람의 몸짓입니다. 이른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전에는 무서운 저주를 유보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한없이 약한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는 기미만 보이면 용서하고 싶어하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십니다.
3. 오늘은 석달마다 가지는 건강검진을 건대병원에서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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