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64호(2020. 3. 2. 월요일).
시편 69:28-31.
찬송 24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사는 건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데 허비하는 시간이, 1년이라는 조사결과가 있었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한 살이라는 나이를 잃어버린 물건 찾으러 다니면서 먹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찾으러 다닌다고, 다 찾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어떤 건 영영 잃어버려,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잃어버렸다는 건, 원래 내 것이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도둑이 들어 훔쳐간 것 같지는 않으니, 잘 간수했더라면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잃어버리는 게 물건뿐일까요? 잃어버려도 휴대폰처럼 당장 불편한 게 아니라서,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 몰랐습니다.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 같지 않은 사람처럼 살다가, 무감동 무표정 냉소 권태 짜증 피로 같은 것들이 신호를 보낼 즈음에서야 깨닫습니다. 원래 내가 이러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면, 어쩐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만 같아 가슴이 허전해 집니다. 그 잃어버린 걸 꼭 찾아야 원래의 나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밤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건/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길>이라는 시였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데 허비하는 시간은 1년. 이번엔 평생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걸 갖기 위해 사는 건지, 잃은 것을 찾기 위해 사는 건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잃은 것을 찾지 않고서는 담 저쪽에 있는 나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왜 잃어버렸는지 더듬어 가는 과정이 없고서는, 계속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년 4월 22일 방송>
2. 오늘부터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사도행전 교회로 돌아가자.” 거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설교나 강연 등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추상적이고 무모하기까지 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초대교회를 이상적으로 가정(假定)한다고 해도, 초대교회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첫 단계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직이나 제도 등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내용인 신앙체계도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매우 미숙한 단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묵상할 고린도 교회 역시 바울 사도가 개척 후 1년 6개월간 가르쳤다고는 하나, 많은 문제들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겠습니다. 하루아침에 뒤집어엎어질 정도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위험천만한 공동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사(1-9절)”과 “고린도 교회의 분열(10-17절)”을 읽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은 1세기 지중해 연안지방에서 흔히 사용하던 편지의 서두를 따르고 있습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명히 밝혀지고, 따뜻하고 격려에 넘치는 인사말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도는 2차 전도여행 중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를 떠나서 다른 여러 곳을 개척한 후 약 3년 후 에베소에 머물 때 기록한 서신인데, 고린도라는 지역이 도덕적으로 시궁창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런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염려는 여러 가지 국면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본문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파벌싸움을 전합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 파로 나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분열을 좋아하는 때문입니다. 보수와 진보는 기본이고, 지연, 학연 그리고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 갈라지고 쪼개기를 좋아하는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이라고 해서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고린도 교회 안에 파벌은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를 따진 것 같습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게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오직 그곳에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집인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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