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93(2020. 3. 31. 화요일).

시편 73:27-28.

찬송 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토록 어렵게 그토록 열심히 요리사를 찾으러 다닌 덕분에, 나시브는 가브리엘라 라는 하녀를 구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나 더럽고 초라한 행색이었지요. 하지만 곧 그녀는 하녀라기에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임이 들어납니다. 거기다 그녀는 나시브의 발등에 떨어진 30명을 위한 파티 음식을 훌륭하게 해결하지요. 젊고 아름다운 외모에다 매혹적인 성격, 거기에다 뛰어난 요리솜씨까지. 어쩌면 모든 남성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이 아닐 지요. 언젠가 만났던 한 해외 주재원의 아니가 생각납니다. 결혼 전까지 그녀 역시 요리를 직접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생활 5년 동안 남편의 업무 때문에, 집에서 파티를 준비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10인분의 초대음식 정도는 눈 감고도 만들지요. 그 말에 함께 했던 여성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터트렸던 기억이 납니다. 독일의 화가 게오르규 플레겔의 그림 중에 <대규모 음식 진열> 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온갖 음식이 다 차려진 성대한 식탁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플레겔은 빵과 설탕 과자와 온갖 과일이 등장하는 정물화를 엄청나게 많이 그렸던 화가입니다. 그러니 <대규모 음식 진열>에는 온갖 음식만이 아니라, 온갖 음식을 그리는 그의 솜씨도 총 동원된 셈이지요. 그런데 그런 대단한 식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이렇게 멋지고 풍성하게 차린 식탁에 초대하고 싶다는 사람. 그리고 이렇게 식탁을 차려놓은 파티에 초대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 말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326일 방송>b.

 

2. “이상한 언어와 예언(20-25)”교회 안에서의 질서(26-33a)”를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단락입니다. 모든 말은 자기의 배경을 토대로 한다는 점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고린도교회가 처한 무질서하고 무분별한 배경을 유감없이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양한 능력과 그 능력을 인정받은 일꾼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적재적시에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교회는 갑자기 무질서한 공동체로 전락한 것입니다. 요즘 서구의 문명국들이 코로나 19로 혼란속에 있듯 말입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상해 부근의 소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닷새 동안 예배에 대한 특강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담임목사님을 만난 첫 자리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우들이 예배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고 했습니다. 찬송에 대해서 설교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목회자의 신학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심각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어디에서 종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문제들의 중심에는 바로 그 교회의 담임자가 순복음교회의 목사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다시 상해를 경유해서 서울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왜 그러시냐고 물으셨고, 저는 순복음교회처럼 만 하지 않으면 바르게 예배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리려고 왔는데, 그 담임자를 앞에 두고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제가 잘 모신 것 같다며 어떤 비판이든 듣고 고칠 준비가 돼 있다면서 만류해서 한 주간 유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요즘 서울의 어느 교회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서 대중 집회를 금하고 있는 시국에 예배는 죽어도 드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서다 벌금형을 맞을 기로에 섰습니다. 제 눈에는 그 교회는 예배 그 자체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는 예배자들의 일방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예배자의 관계 맺기인가? 예배 순서가 필요한 이유와 예배 내용의 구체적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 등, 끝없는 질문이 예배를 예배답게 구성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예배를 질서가 있고 통일성이 있고, 의미와 목적이 분명한 신학이 뒷받침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한다면, 신앙은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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