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35호(2020. 8. 20. 목요일).
시편 102:1-3.
찬송 23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형에게> 그냥 좀 답답해서 써서 올린 건데, 형의 편지까지 받고 나니까, 푸념도 가끔은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네. 요새말로 바쁘고 유능한 형을 낚을 수 있었다니 말이야. 형, 낚여줘서 고마워. 사실 그 글은 어떤 작가의 창작 론을 읽고 난 뒤에 쓴 글이라, 더 비관적으로 느꼈을 거야.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가 쓴 창작 론에, 그의 무명시절 이야기가 잠깐 나오더라고. 그 작가는 자신의 글 취향과도 맞는 출판사를 겨냥하고, 작품을 써서 근 8년 넘게 한 출판사에 투고를 했었데. 그런데 딱 첫 작품 보냈을 때만 보낸 원고에 몇 마디 메모가 써져 있을 뿐, 8년 내내 어떤 설명도 없이 원고를 되돌려 보냈다는군. 게다가 맨 처음 보낸 원고에 덧붙인 메모라는 것도 이런 내용이었어. “원고를 스테이플로 찍지 마세요. 클립만 끼워 투고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재미있지 않아? 얼마나 많은 무명작가들이 그런 식으로 원고를 보내는지, 스테이플로 떼어내는 일조차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클립만 끼워서 보내라는 거잖아. 그런대도 그 작가는 무려 8년 동안이나 그 짓을 했다지 뭐야. 좀 질리는 기분이 들었겠지? 그런 지난(至難)한 세월을 거친 후, 마침내 성공한 그 작가가 이런 충고를 하고 있어. “글을 쓰고 싶다면, 책상을 방 한 귀퉁이 자리로 옮기라.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라고. 인생 속에 예술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니, 예술 한답시고 크게 잘난 척하지 말라. 뭐, 기거지 뭐. 형 말대로 인생의 안전한 길이란 없겠지. 정당하고 안전한 도피처 역시,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테고 말이야. 어쨌든 형 편지 받고 나서 중요한 것 하나 깨달았어. 20대에 벌써 40대 50대 걱정까지 가불(假拂)해서 하지는 말자. 그 중요한 것 알려줘서 고마워, 형.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4월 30일 방송> b.
2. “유다의 자리를 채운 마티아(12-26절)”을 읽었습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많은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심점에 계시던 주님이 승천하시고 나자 누가 지도자로 일할 것인가 하는 것과, 둘째는 주님이 뽑으신 12 제자들 중에서 가룟인 유다가 배신을 하고 자결을 하자 그 빈 자리를 채워야 하는 문제, 셋째는 이런 모든 결정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이었습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일거수일투족은 훗날 형성된 예수교 혹은 기독교회의 범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신앙생활은 물론 개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는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몇 가지 기준점을 공포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준은 성경말씀에서 찾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 한 사람을 보충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시편 69:25에서 가룟 유다를 제하는 근거를, 그리고 시 109:8에서 대신할 제자를 뽑는 근거를 삼았습니다. 세 번째는 민주적인 선거방식을 택했는데, 우선 두 사람을 추천하게 하고 그 둘 중에서 뽑는데 그 자리에 함께 했던 120명의 교우들이 참여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이래로 교회가 정착하게 되고 그 수도 늘어감에 따라서, 이런저런 제도와 장치를 마련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정신이란 순수성이 엷어져가고, 대신 이해와 권력이 기승을 부리는 세속주의가 침투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역시 세상의 부정과 부패의 한 복판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교회 본질과는 무관한 세속주의의 침투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생겨났고, 서양에서는 퀘이커 교도와 형제교단이 일본에서는 무교회주의 등이 생겨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함석헌 유달영 장기려 원경선 등이 참여했었는데, 대부분 기성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죄인들의 소굴인 때문에 이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오늘의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이 걱정할 정도로 타락한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세상을 비출 빛도, 맛을 낼 소금의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힘차게 외쳤던 <남은 자 사상>처럼, 말라빠진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돋게 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신앙이 더욱 절실해 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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