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55호(2020. 9. 9. 수요일).
시편 104:31-35.
찬송 5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관계든 더 사랑하는 쪽이 항상 약자(弱者)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항상 더 사랑받는 쪽이지요.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그래서 나온 걸 겁니다. 부모가 되고 나니까, 거꾸로 자식에게 내가 좀 더 사랑을 하지요. 연인끼리는 더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받기도 하겠지요. 우리는 모두 상대보다 더 사랑은 받는 사람이면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는데요. 누가 더 사랑하는가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상대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같이 있을 때, 밥 먹는 것도 가끔 잊어먹지만, 사랑 받는 쪽은 식사 시간이 되면 밥부터 먹자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옷을 보면 그에게 어울릴까 생각하지만, 사랑받는 이는 좋은 옷을 보면 자신의 취향인지를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은 그래도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늘 생각을 하지만, 사랑 받는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 사람인지 때때로 잊어버리는 거지요. 역시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한 일인가 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9월 6일 방송>
2.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1-15절)”을 읽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을 주 무대로 복음사역을 하신 주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지방의 농어촌 사람들과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는 암하레츠, 헬라어로는 오클로스라고 불렀습니다. “땅의 사람, 시골뜨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는 변방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제대로 끼니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으니, 항상 배고픈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하루 저물어 가는 때에 일어났던 일화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다행히 공관복음서에 평행귀가 있어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당연히 이 시골뜨기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또 다른 일화(막 8:1-10, 마 15:32-39)를 참고하면 사흘 이상을 굶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을 배고픔의 슬픔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런 말씀들이 확 가슴에 와 닿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물로 배를 채우는 지혜를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는 이 경험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실 때 그 첫 번째가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의 의미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형성에 가장 큰 자산이 되었던 것이 40년간 광야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었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고발과 손해배상이라는 경고를 수없이 들으면서도, 주일마다 대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궁색한 진실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대인의 신앙형성의 내용과 의미를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입니까?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가난한 소작농을 위해서 자신의 토지를 전부 분배해 주었던 톨스토이의 실천적 신앙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배고픔의 문제는 우리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매일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행사를 하지 않으셨을까? 어두운 골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울부짖는 시골뜨기들의 눈물의 탄원을 외면하고 계시는걸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해답은 주님의 제안에 한 어린 아이가 내민 자신의 도시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 마 14:16, 눅 9:13)는 말씀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그 내용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듣고 행하는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 대목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해방신학의 공헌입니다. 균형 잡힌 신학이 아니라 한쪽으로 쏠려서 시골뜨기를 예수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지나쳤습니다만,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주님께서는 조금 넉넉한 사람과 조금 모자란 사람을 함께 어울려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오므린 팔을 펴기만 하면 해결할 문제들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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