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63호(2020. 9. 17. 목요일).
시편 105:24-27.
찬송 10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한 손에 꼭 쥐었던 동전 한 닢을 다른 손으로 옮기면, 그 동전은 단순한 동전이 아니라 손에 온기가 묻어 있는 동전이 되지.” 1969년 한 20대 미국인 여성이 알라스카 체포나크의 외딴 마을 이누잇으로 봉사활동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우연히 한 이누잇 여성을 만났는데, 목걸이가 마음에 들어 예쁘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이누잇 여성이 그 자리에서 바로 목걸이를 풀어서 그녀에게 주었는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이런 일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누잇 사람들은 소유물보다 인간과 자연, 개인의 성취보다 집단의 행복을 더 소중하게 여겼고, 누가 자신의 물건에 호감을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내 주었지요. 이 날의 일은 그녀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과 함께, 인생에 새로운 목표를 주었습니다. 바로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일구는데 헌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주디 윅스, 미국 최초로 지역상품을 이용한 유기농 음식과 인도적으로 길러진 식재료만을 이용한 요리를 내놓은 화이트 독 카페의 창업자이자, 현재 지역생활 경제 활동의 국제지도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디 윅스가 화이트 독 카페를 연건 1983년. 필라델피아 대학가에 있는 낡고 허름한 건물 1층에서 이었습니다. 원칙이 있었지요.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로컬 푸드만 사용하다는 것과, 로컬의 음식가운데서도 유기농 식재료와 인도적으로 길러진 축산물만 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원칙만 지켜도 맛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대부분의 식재료가 풍미가 떨어지는 이유는, 장거리 수송도 큰 몫을 차지하니까요. 이렇게 시작한 레스토랑은 연간 50억 매출을 기록하면서, 미국에서 가볼만한 레스토랑 가장 일하기 좋은 중소기업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사업을 확장하기 마련이지만, 그녀는 남은 이윤을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봉급을 올려주고, 음식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지역 농부와 어부 축산업자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환원했습니다. 20대부터 꿨던 꿈을 실현시킨 거지요. 그녀의 꿈은 비즈니스란 돈이 전부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관계라는 신념을 현실화 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화이트 독 카페가 구상에 멈추지 않고 실현시킨 것은 한 친구의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한 손에 꼭 쥐었던 동전 한 닢을 다른 손으로 옮기면, 그 동전은 단순한 동전이 아니라 손에 온기가 묻어 있는 동전이 되지.” 많은 사람들이 돈 벌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이처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그리고 어떤 돈을 벌 것인가 깊이 고민해 본적이 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5년 11월 10일 방송>
2. “이 분이 그리스도인가?(25-31절)”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리라(32-36절)”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첫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민족 전체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왕이었는데, 차츰 발전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을 구원하고 다스린다는 종말론적인 왕인 메시야 대망 사상입니다. 이런 메시야 대망 사상은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서 더욱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메시야는 구세주라는 말로 굳어졌는데, 적어도 유대인들은 눈을 크게 뜨고 유명한 지도자가 나타났다하면 메시야인지 여부를 묻곤 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이 질문이 예수께로 향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메시야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언행에서 메시야 성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죽이려는 데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옳은 말을 할 뿐 아니라, 그동안 해온 수많은 기적들에서 그들은 이 보다 더 분명한 메시야 자질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한걸음 더 앞서 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있는데,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예수께서 언급하는 나를 보낸 분이란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따져묻지도 않고 그것을 트집 잡아 붙들지도 않았는데, 요한복음서 기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해설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메시야 대망론이 있었는데, 하나는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는 종말론적 왕을 대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와 죽음을 정복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대속적 제물로 바치는 분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물론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전자를 선호하고 있었는데, 이 간극을 없애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던 뜻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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