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239호(2021. 3. 12. 금요일).
시편 시 139:1-4.
찬송 2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명성이란 무엇인가? 꿈에 지나지 않는다.” 프란치스 그릴 파르쳐가 남긴 말입니다. 그릴파르처는 1791년부터 1882년까지 81년을 살다간 오스트리아의 극작가입니다. 26살에 운명 비극 [할머니]를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발표한 연애 비극 [사포] 그리스 신화 소재를 가져온 비극 [금빛 양모피]로 거듭 성공을 이루었는데요. 그릴 라프체가 비극 작가로써 이름을 떨치고 성공을 거둔 데에는 그의 인생이 있었습니다. 과묵하고 냉정하고 비사교적인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죽음, 18살 때 빚을 남기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어서 10년 뒤에 자살한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선량하면서도 열정적인 성격이었지만 신경 쇠약증세가 매우 심했습니다. 그릴 파르쳐는 이 두 사람의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소화를 시키지 못했지요. 그의 불행은 주로 자신의 성격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아에 대한 계속적인 방해서 싫어서라는 이유, 자기 내 부에 있는 고독을 채우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약혼도 파기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인생의 최후를 맞는 사람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겼고, 산다는 것이 뭐라고 해도 인생의 최고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47살에 발표한 유일한 희극이 비웃음과 혹평을 사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더는 작품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2월 10일 방송>
2.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31-38절)”을 읽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의 라틴어 번역은 Veritas vos liberabit입니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교훈으로 새김질 했던 말씀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려는 의도는, 진리를 추구하는 목적을 좋은 직장을 위해서도 아니고, 좋은 배필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학에서 추구하는 진리는 좋은 직장과 좋은 배필 등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삼스럽지만 진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자유임을 확인하고 자유의 의미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첫 설교는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날의 성경 읽기가 이사야 61:1의 말씀으로, 그 말씀을 본문으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를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굴레로부터 자유 하는 삶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던 복음의 요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중심에 주님께서 우뚝 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자유란 무슨 의미일까요?
미국이 식민지 의회인 시절 하원의원이었던 패트릭 헨리(1736-1799)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자유가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인류가 과학화하고 현대화하면 할수록 자유의 가치는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끝없는 자유에로 향한 불만과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말입니다. 자유란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중시하며, 건전한 개인주의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무한한 자유는 방종을 향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 권력자들의 자유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방패막이를 앞세운 이들이 사회 공동체를 얼마나 헤치는 지를 말입니다. 최근 코로나19 에 대응하는 서양인의 자유 개념은 결국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는 것으로 반증되고 있습니다. 사회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이란 어리석은 자기 파괴로 치닫을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속적 차원에서는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유지하는 도덕률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생각한다면,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인간 스스로는 죄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의 율법의 요구를 대신 들어주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책임을 끝까지 짊어지시고 죽기까지 하신 예수를 바라보는 일, 예수의 구원행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소위 믿음의 행동 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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