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67호(2021. 10. 26. 화요일).
시편 시 37:1-3.
찬송 17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고요한 산사에 있는 약수터인데요.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돌확에 고여서 일정한 시간이 되면 넘쳐흐릅니다. 거기에 있는 물바가지로 물을 떠먹으면 돌확에 고인 물은 그만큼 줄어들고, 다시 고이기를 기다리지요. 그걸 보면 시간은 빠르고 느린 것이 아니라, 단지 비우고 채우는 모양만 바뀔 뿐, 물이 고이는 돌확은 견고하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만이 모든 걸 적당하게 조절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쁜 일상을 살기에 그런 돌확처럼 살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정확한 물시계를 만들었나 봅니다.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온전한 형태의 물시계는, 원나라 때인 1316년에 만들어졌고요. 현재 중국 역사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습니다. 이 시계는 4개의 누호가 연결되어 있고요. 각 누호는 계단 모양의 틀 위에 안정적으로 놓여 있습니다. 문명의 발전이 거듭 되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아주 편리해졌지요. 하지만 가끔은 문명의 외곽지대에서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돌확에 고여 있는 물방울의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9월 17일 방송> b.
2. “이상한 언어와 예언 1(1-12절)”을 읽었습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방언(方言)이라고 하는 이상한 언어는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던 낯선 언어임에는 분명합니다. 한 때는 영어로 방언한다든지 러시아어로 방언을 한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실제로는 영어도 러시아어도 그리고 세계 그 어떤 언어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방언을 사용하는 본인조차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학부생 시절에 수색이란 곳에서 2년 간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누이동생 하나가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밥과 빨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누이가 어느 날 조용히 제게 물었습니다. 방언을 하게 되었다면서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목사 수업 중인 오빠도 못하는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성취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방언기도를 하는 날이면 기쁜 마음으로 밤을 새울 수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은 좀 그랬지만 방언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이니까 잘 간직하라고 하면서,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방언을 사용하라고 권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린도 교회를 포함해서 초대 교회 안에서도 방언이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80년대는 한얼산 기도원에는 방언을 사모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저도 이 놀라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방문했었습니다. 오전과 저녁 집회를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나무를 붙잡거나 바위를 붙들고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는 기도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주 삼창>이라는 외침이 밤이 새도록 한얼산과 주변을 진동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사도가 방언 은사에 대한 초대교회의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6-11절). 방언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2절). 셋째는 방언을 해석하는 능력을 얻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뜻도 모르는 이상한 말만 늘어놓는다면 정상적으로 생각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13-14절). 넷째는 방언 기도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기도를 권하고 있습니다(15-17절). 까닭은 교회의 다른 교우들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해서 아멘으로 동참할 수 없는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섯째는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정상언어가 더 좋겠다고 권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방언의 용도가 정상언어 보다 10,000분의 5로 매우 무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단 방언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 또한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위해서. / 고전 14:26-40. (0) | 2021.10.28 |
---|---|
교회를 혼잡하게 하는 방언은 삼가야. / 고전 14:20-25. (0) | 2021.10.27 |
실천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 고전 13:4-13. (0) | 2021.10.25 |
21세기 교회의 목적과 역할을 고민할 때. / 고전 12:27-13:3. (0) | 2021.10.23 |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 행복. / 고전 12:12-26. (0) | 2021.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