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46(2022. 1. 13. 목요일).

시편 시 51:7-9.

찬송 4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가만히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허공에 떠가는 구름을 보라. 쉼 없이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꾸며 흐른다. 무엇이 구름을 흘려서 바꾸게 하는가? 허공의 바람이다. 구름도 바람도 다 움직인다. 이처럼 만물은 다 변화한다. 노자는 변화를 이끄는 것을 일러 도()라고 했다. 노자는 변화를 매우 어렵게 풀어놓았다. ‘이지러지면() 온전하게 하고(), 굽으면() 곧게 하고() 움푹하면 차게 하고, 낡으면 새롭게 하고(), 적으면() 얻게 하고(), 많으면() 잃게 한다()’ 온전하면 이지러지고, 곧으면 굽어지고, 가득 차면 움푹해 지고, 얻으면 적고, 잃으면 많다. 이렇게 뒤집어 말해도 되는 것이 변화이다. 인생 역시 이런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을 일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지 않는가. 웃음이 눈물이 되고, 눈물이 웃음이 된다. 성인은 누구인가? 노자는 성인을 일러 도를 본받는 사라이라고 했다. 포일(포일)하는 사람이 곧 성인이다. 하나를 껴안는 이가 곧 성인이다. 물론 일()은 도를 뜻한다. 어떻게 도를 본받는가? 성인은 어떻게 도를 본 받는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현명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지 않아 옳은 것을 드러내고, 공치사를 하지 않으므로 공이 돌아가고, 제자랑을 하지 않으므로 길이 존경받는다. 이처럼 노자의 도는 우리를 여유있게 한다.” 윤재근의 <내 마음속 조용히 살어리랏다> p. 47.

 

2.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43-51)”을 읽었습니다. 때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주님의 첫 제자가 된 다음날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니까 빌립과 나다나엘이 두 번째 제자가 된 시점이 하루 간격이라는 말입니다. 요샛말로 개진도진이라는 뜻입니다. 군대에서는 짬빵 수로 서열을 가리는 엄격한(?) 문화가 있는데, 누가 먼저 그리고 얼마나 차이나게 선배가 되고 후배가 되었느냐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빌립을 만나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제자의 현주소를 정의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라는 말 말입니다. 빌립은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큰 사건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분을 만났다.”고 전한 것입니다. 빌립 역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되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다나엘을 만나셨을 때, 누구에겐가 말하듯 이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으로 거짓이 조금도 없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면전에서 이렇게 말하자, 나다나엘과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시느냐?”고 했고,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하자, 나다나엘은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사람됨에 대해서 일찍이 주목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네 번째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그는 메시아에 대해서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나사렛과 무관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과 관련된 분이시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메시아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주님이 지적하실 때,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을 알아차렸으니 말입니다. 셋째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무화과나무 그늘 밑에서 마음 졸이며 기도하는 자신을 알고 계신 분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게 되어, 주님을 메시아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래 전 어느 해 신정을 맞아 한 외국인 교수님댁을 세배하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일대학을 나와 연세대학에서 고전어(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1960-1978)를 가르치시던 굿윈(Goodwin)이란 교수셨습니다. 사실 저는 그분에게 아무 것도 배운 일이 없었는데, 제가 목회하던 부산에 내려오셔서 은퇴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로 연락을 하고 간단한 설빔을 준비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착했을 때 루터교 예배의식문을 꺼내 놓으시고 저에게 가르치실 준비를 다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격려의 말씀과 바른 예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눌한 한국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나다나엘과 같은 감격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교수님은 참으로 스승이십니다. 감사합니다.”

 

3. 윤재근교수(한양대)는 함양 분이어서 어머니를 생각나게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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