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59(2022. 1. 26. 수요일).

시편 시 55:1-4.

찬송 5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에든 주어지는 보상이나 대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린 무조건 그 일을 더 많이 좋아하고 즐기게 될까요?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대시는 그 주제로 한 가지 실험을 했어요.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하게 했지요. A그룹에게는 퍼즐을 풀 때마다 상금을 주고요. B그룹에게는 그냥 퍼즐을 풀어보게만 했지요. 그리곤 실험이 모두 다 끝낸 뒤, 어느 쪽이 실험실을 나와서도 퍼즐게임을 더 많이 즐기는지 계속 주시했습니다. 결과는 보상을 받은 A그룹보다 오히려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은 채 퍼즐을 풀었던 B그룹 쪽 학생들이, 실험 후에도 더 자유롭게 더 많이 퍼즐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심리학자 대쉬는 어떤 일에 반드시 보상이 주어져야 그 일을 더 많이 즐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때마다 반드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일 자체에 대한 흥미나 즐거움이 오히려 떨어지기 쉽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직정을 다니다보면 요.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도, 차츰 이거 내가 월급 위해서 일하는 거 아냐?” 이런 본말전도가 일어나기도 하지요, 가끔. 일 자체에 대한 생기나 활력을 잃고, 단지 돈 때문에 무슨 일을 하는 듯 한 무기력이 생기기도 하고요. 물론 심리학자 대쉬의 결론이, 월급도 없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하는 게 더 낫다거나, 열심히 일한만큼의 더 많은 보너스가 필요 없다는 식의 결론은 아니지요. 그 보다는 내가 내 일을 좋아서 정말 열심히 할 뿐이고, 그러다 보니 돈이든 명예든 여유든 다 따라올 뿐이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돈과 명예만 바라고 그것만 추구하거나 좇지말라는 것이겠지요. 그런 뜻에서 내가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게 혹은 즐기고 있는 최고 순위가 무엇일지, 가끔씩 꼭꼭 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22일 방송>

 

2. “아들의 권한(19-29)”을 읽었습니다. 아주 가끔은 예수님과 동시를 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잔잔한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시절이어도 제가 유대인의 제사장이나 서기관 또는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와 같은 일을 했을 것을 가정했을 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께서 당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셨다면, 그런 말씀을 곁에서 듣고 있었다면,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인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며, 오히려 바리새인에 가까운 사람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 예수님께 대들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중략>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존경하듯 아들도 존경하게 된다. 아들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 때, 잠자코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육신을 가지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을 때, 피가 역류하는 그런 반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이게도 우리는 마치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먼저 읽은 뒤에 그 내용을 감상하듯, 편안한 시청자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 밖인 때문입니다. 아직도 확인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경기도 모란 공원을 지난 언덕 길가에는 오석으로 된 <예수 지묘>를 발견할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신흥종교가 번창했고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몽골에 선교하러 갔을 때, 교회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낮은 계곡 지대에 산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제사를 지낸 흔적들이 역력했습니다. 주로 양의 뼈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고, 불을 지핀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몽골인들의 무당이 일반인의 생활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하는데, 기독교회가 선교한 후에는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어떤 한국인 선교사는 우상의 집을 불태워야 한다고 부추겨서, 인근의 절간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21세기 현대에도, 타 종교에 대한 비방을 넘어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종교의 본 모습을 벗어난 행위일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이 땅에 들어올 때 가장 큰 종교 세력은 불교와 유교 그리고 천도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박해를 당한 것은 이런 기성 종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 당국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왕권이 엄중할 때에도 무당과 박수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종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앙을 힘과 권력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때문입니다. 종교의 포교 방법은 사랑과 정의에 바탕을 두어야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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