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69(2022. 2. 5. 토요일).

시편 시 56:7-9.

찬송 22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항존진질(恒存疢疾). 항상 열병을 앓듯이 산다. 맹자의 말씀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맹자는 밝힌다.

   덕혜술지(德慧術知). 덕을 행하는 사람이 성실히 산다. 지혜()를 터득하려는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방법()을 익히려는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려는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

   덕을 행하기는 쉽지 않다. 후덕한 사람을 만나기에 얼마나 어려운가! 자혜를 터득한다는 것은 요행이 아니다. 어질게 살려는 마음이 있어야 지혜를 터득한다. 학술(學術)도 참으로 어렵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려면 참으로 힘겹다. 항상 새로운 지성을 쌓는 일 역시 무척 어렵다. 되는 둥 마는 둥 살아서는 안 된다. 흥청거리며 되는대로 막 사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버린다. 이보다 더 못난 짓은 없다. 스스로 소중한 자신이 되려면 먼저 날마다 사는 마음 가짐과 행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맹자는 주경(主敬)을 강조한다.

   경건하게 살라. 함부로 살지 마라. 덕을 행하며 지혜를 터득하고 학술과 재능을 겸비하라. 이는 성실하게 살라 함이다.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하다.” 윤재근, <내 마음속 조용히 살어리랏다>, p.120.

 

2. “초막절 명절에 올라 가신 예수(10-24)”, “이분이 그리스도인가?(25-31)” 그리고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리라(32-3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떠돌고 있는 이야기들을 정리한 내용과, 그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대답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루살렘 시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엘리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메시야 대망과 같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높은 식견을 가졌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假定)에서 본문을 볼 때, 그들이 메시야 대망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편중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관심이나 문제제기보다는 비본질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핵심을 비켜가는 지엽적인 문제제기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를 말하면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유대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하면서도, 대중을 상대로 당당하게 설교하는 예수를 향해 한 마디 반박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물음과, 다음으로는 오실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실지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이 하신 대답도 기록해 두었는데, 일단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일부 동의를 하면서, 실제로는 나사렛이나 베들레헴 같은 지리적이며 가시적인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인지 (혹은 악마로부터 오신 분인지)에 대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준비는 유대인을 능가할 사람들이 없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아 대망 속에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수많은 예언자들의 글을 통해서 메시야 대망에 관한 기도와 예배 그리고 부단한 교육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들에게서 실상은 그들의 메시야 대망이 영적이며 신앙적인 내용이 아니라, 현상적인 겉치레에 불과했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마치 천국을 대망하며 살아가야 할 현대의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천국에서 얼마나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누릴까에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이해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가령 213일 주일의 복음서 눅 6:17-26을 읽는 크리스천들이, 복 있는 사람과 화 있을 사람을 제대로 읽고 따르려 하지 않고, 어물쩍 세속적인 복과 화로 치환하듯 말입니다. 가난이 왜 복이 되며 그리 살아야 하는지, 주림이 왜 복인지, 왜 부요함이 화가 되고 왜 웃는 일이 애통함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새롭게 자세를 고쳐 잡고 살아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메시야가 누구시며 무엇 하러 오셔야 하는지를 묵상하지 않고서는 엉뚱한 희망사항을 채우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문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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