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66(2022. 2. 2. 수요일).

시편 시 55:22-23.

찬송 2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상(無相), 모양()이 없다. 무주(無住), 머물 곳()이 없다. 무념(無念), 생각()이 없다. 이처럼 무()는 없다는 뜻으로 낯익어 있는 말이다. 없다는 것은 옹색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저것 시비를 가리지 않아 홀가분하다 함이다. 어느 것 하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걸릴 것이 없음이다. 그러니 무()는 자유 그것일레라. 나를 묶어 두거나 붙들어 두려는 것들이 없음이다. () 즉 모양이란 무엇인가? 어떤 주장이나 주의 등이 모두 모양이다. 고집하는 주의나 주장은 나를 붙들어 묶어 두게 마련이다. 그러면 저절로 한 자리를 차고앉아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는 터를 잡는다. 그러한 터를 일러 주()라고 한다. 고집할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다. 마음 쓸 일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곧장 마음은 편하다. 무심하다는 것은 한량없이 마음이 편안하다 함이 아닌가? 마음 고생이 몸 고생보다 더 괴롭다. 마음 고생을 겪어본 사람은 왜 마음이 편해야 하는지 안다. ()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무애(無碍)라는 말이 있지만, 그냥 무()라는 한 자면 족하리라. 그러나 무()뒤에 상(), (,) ()등을 달아 붙여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번뇌망상을 일삼아 여러 방법으로 소란을 피우는 까닭이다. 마음이 짓는 소란을 단칼로 잘라 버리는 칼이 곧 무() 셈이다. () 아프게 하는 칼날이 아니라 편안케하려고 상처를 도려내는 칼이다.”

윤재근, <내 마음속 조용히 살어리랏다>, p.169.

 

2. “하늘에서 내려온 빵 2(52-59)”을 읽었습니다. “나는 ~~이다.”는 형식의 말씀을 계시 문구 혹은 계시 복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래 계시란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사용되는 말인데, “신의 감추어 있던 진리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고 하고, <계시 문구>, 혹은 <계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계시 문구는 우리 인간의 논리나 어법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며 깨닫는 말씀과는 달리,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어야 한다고 하시니 난감합니다.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주님은 이른바 마지막 만찬(14:12-26, 26:17-29, 22:7-23, 13:21-30, 고전 11:23-25)에서 분명하게 제정하실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훗날 교회는 <주님의 만찬> 혹은 <성찬>이라는 예식으로 보존한 것입니다.

   최근 전통을 소홀히 해 오던 개신교 일각에서도 성찬의 중요성을 깨닫고 연중 2차례(부활절과 성탄절) 시행하던 성찬례를 월 1회로 시행하는 교단과 루터교회나 성공회처럼 매 주일 공예배에서 시행하는 교회도 생겨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분이라면 성찬이 초대교회 이래로 주일 예배에서 시행되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을 자주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럽지만, 성찬의 이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으로 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다양성은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다양성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 말씀의 풍부함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는 떡을 성별하는 순간에(종을 침) 떡은 주님의 살로, 또 포도주를 성별하는 순간에(이때도 종을 침) 포도주가 주님의 피로 변한다는 소위 화체설(化體說), 루터교회는 떡과 잔을 성별할 때 그것들에 주님께서 실재하신다는 실재설(實在說), 장로교회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한다는 상징설(象徵說)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로 긴 토론이 필요하지만, 루터교 목사요 신학자로써 화체설은 지나친 해석이고, 상징설은 너무 가벼운 해석이라 생각되며, 주님의 말씀대로 성찬에 함께 하신다는 실재설이 바른 해석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다양한 신학배경을 가진 분들을 억지로 강요할 마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면 족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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