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94(2022. 3. 2. 수요일).

시편 시 63:1-3.

찬송 4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연휴에 모처럼 그림 전시회엘 다녀왔거나, 갈 계획인 분도 없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엔디 워홀전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대단한 화가들의 전시회가 계속되고 있어요. 심리학자인 앤디 스미스와 앨랜 랑건은 그림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다음에, 모네의 똑 같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A그룹에게는 그림의 제목을 가르쳐주고요, B그룹 학생들에겐 제목을 가르쳐 주는 대신, 제목을 마음대로 붙여보라고 했지요. 그리곤 두 그룹 중에 어느 쪽이 작품을 더 오래 감상했는지, 또 어느 쪽이 자신이 본 그림을 더 많이 좋아하게 됐는지 조사했습니다. 그러자 원래 제목을 알고 그림을 본 A그룹보다 자신들이 제목을 붙여가면서 그림을 본 B그룹 쪽의 학생들이, 그림 감상도 오래하고 그림 자체를 훨씬 더 즐기고 좋아한 것으로 나타났어요. 자신만의 창의적인 생각을 허용 받을 때, 대상에 대한 관심이나 호감이 훨씬 커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율성이 참 중요하다는 얘기인데요. 사실 저도 가장 감동적으로 봤던 그림 중의 하나가 마크 루스코의 그림이었어요. 마크 루스코의 특유의 흐리고 짙은 초록색 사각형 그림을 전시회에서 보게 되면서, 그 그림 제목을 스스로 깊은 바닷속, <심해> 이렇게 붙였거든요. 나중에는 아예 그 그림 제목을 <심해>로만 기억하기도 했고요. 그 그림의 원래 제목이 제목 없음의 무제여서 더 그랬긴 했지요. 그러니 혹시 그림 제목을 두고, 친구와 내기라도 하면 질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전시회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들에는 물론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물건, 또 장소 사람들에게 나만의 제목이나 별명 애칭을 붙이는 거야말로, 더욱 특별한 애정의 한 표현법이자 지속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31일 방송>

 

2.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9-14)”을 읽었습니다. 많은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기도에 열심인 나라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지인 한 분은 한국 개신교회의 새벽기도를 연구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선교 100년이 조금 넘은 한국교회가 비약적인 성장을 한 배경에는 이런 열성적인 기도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열성적인 기도의 배경이 불교나 민간신앙의 기도현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안수를 받은 부산 개금동의 신일교회에서 36개월 목회하는 동안 새벽 2시만 되면 바로 윗마을에 있는 절간에서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종하기 전 저의 할머니는 민간신앙에 심취하셨는데,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자정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손을 비비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니 한국 개신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은 동시대의 주류였던 불교나 민간신앙에서 물려받았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복신앙까지도 전해진 것은 무리한 추론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당시에 유대교 신앙에서 볼 때 가장 철저한 모범 신앙인이었던 바리새파 사람과, 가장 나쁜 사람의 대명사인 세리를 무대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효과적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두 종류의 기도자들을 오랫동안 주목하셨고, 그들의 특징을 잘 비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과 가장 악독한 사람의 기도를 대조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파인의 기도를 분석하셨습니다. 첫째 그는 감사할 것이 많음을 기도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이유가 욕심과 부정직 그리고 음탕한 세리를 끌어들이는 비교법이었습니다. 일종의 자화자찬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랑하는 내용입니다. 금식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신앙태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천기누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바리새파가 말하는 금식이나 십일조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 때, 이를 발설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세리의 기도는 두 가지 특징을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서 하늘을 우러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 합니다. 둘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 많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인정해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하는 것이라 할 때, 세리의 기도가 바른 기도였다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했으나 실패했고, 세리는 소원대로 하나님의 자비를 얻었습니다. 차제에 우리는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의사소통)이며, 감사와 탄원 찬송 바람 등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점에서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를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3. 오늘은 성회수요일로 사순절의 첫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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