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90호(2022. 2. 26. 토요일).
시편 시 61:5-8.
찬송 36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명한 현정이에게> 현정아, 네 편지 두 번 세 번 꼼꼼히 잘 읽어 봤어. 찔끔 울기도 해서 같이 방을 쓰는 친구가 나쁜 소식이냐고 걱정스럽게 묻기까지 하더구나. 그래서 나쁜 소식이 아니라, 아주 좋은 소식이라고, 훌륭한 친구가 보내준 귀한 편지라고 일러주었어. 물론 여기서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한국의 뉴스들 들을 수 있어서 힘들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어. 내가 머무는 곳도 뉴스 보기가 무서울 만큼 뭉텅뭉텅 인원을 감축하고 있고, 제법 이름난 회사들마저 문들 닫는다는 소식이 매일같이 들려오거든. 그런 와중에 생필품 값마저 많이 올라서, 더 버티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그런 결정을 해 놓고도 여전히 아깝다, 아쉽다, 안타깝다 이런 감정들에서 놓여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런 내 감정에 젖어 지내느라, 너는 헤아린 우리 부모 마음을 정작 딸인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구나.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전할 때 말리지도 못하고 한 숨만 쉬시던 엄마 아빠의 속마음은 또 어떠셨을지. 조금만 더 사려 깊게 생각했다면, 너에게 내 마음 아픈 것만 그렇게 전하지만 않았으련만 말이야. 힘들다고 투정하는 내 얘기 다 들어주고 토닥거려주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요한 것은 넌지시 따로 일러준 너라는 존재, 친구라는 존재가 오늘처럼 묵직하게 다가온 적이 없구나. 그러고 보니 친구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소중한 눈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 눈으로 미쳐 다 못 보고 못 헤아린 것들을, 나대신 봐 주고 헤아려주고 일러주는 사람이 바로 친구겠지. 네 말대로 속상한 마음은 이곳에 놔두고 활짝 웃으면서 돌아갈게. 이만큼 만이라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고마웠다고, 부모님께 큰 절도 할 셈이야. 그래야 돌아가서 재출발을 할 때도, 더 큰 힘을 낼 수 있겠지. 중요한 사실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종종 이런 충고 부탁할게.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년 3월 19일 방송> b.
2.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20-26절)”을 읽었습니다. 이방인(혹은 외국인 또는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 혹은 그 개인이 포용적인지 폐쇄적인지를 가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 3국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해서 혹은 이방인에 대해서 관대하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가령 우리나라처럼 종교 간의 갈등이 적은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종교의 자유입니다. 물론 소수의 근본주의자들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며 사회적인 이슈를 불러오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나라는 이방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심각합니다. 같은 민족 안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상종을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방인과의 교류는 상업적인 필요에 따르거나, 이방지역에 살게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 등으로 극히 제한된 경우라고 합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리스 지역 등에 거주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그리스 이방인들은 사도 빌립을 찾아와서 주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빌립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의 이름으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주님 당시에 이미 유대 나라에 그리스어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테판이란 이름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그리스의 영웅 알렉산더의 부친의 이름이 빌립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이방인 그리스인들은 그 목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진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의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확인차 찾아온 것 같습니다. 메시야관의 혼란과 충돌로 유대교 정통을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분노로 공공연히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집단을 이룬 공동체) 유대인들은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러 유대를 방문했는데, 그들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당시 선풍적인 주목을 받고 있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일지 모르는 그분을 유대 주류 사회가 죽이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으니 더욱 더 궁금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이른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둔다고 말입니다.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도 숱한 한 알의 밀알들이 있었습니다. 애국 애족이라는 대의(大義)로, 신앙전파라는 순교(殉敎)로, 신념과 명예를 지키려는 의리로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던진 것입니다. 우린 무엇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할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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