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95호(2022. 3. 3. 목요일).
시편 시 63:4-7.
찬송 5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 작가 찰스 램의 수필 중에, 아주 먼 옛날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실수를 다룬 수필이 있습니다. 평소에 호기심이 많던 소년 보고는 불을 피우는 장면을 자꾸 하다가 그만 실수로 집을 태우게 되지요. 보고의 집에서는 돼지를 키우고 있던 터라, 돼지들도 그만 다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와중에 그걸 죽고 먹게 된 보고는 그 특별한 맛에 놀라서 넋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을에 쫙 퍼지지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 맛을 보기 위해서 집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구워진 돼지를 맛있게 먹는데 다 먹고 난 후에야, 모두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지요. 찰스 램이 경고 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금세 알 수 있지요. 작은 걸 탐하다가 큰 걸 잃는다. 소탐대실이라는 한자 성어가 얼른 떠오르기도 해요. 그런데 사실 소탐대실의 근본은 무지 어리석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지요. 맛있는 고기가 불에 구워진데서 나왔다는 것을 미쳐 알거나 생각하지 못하고, 집 전체가 불탄 데서만 나왔다 생각한 탓이니 말이 예요. 그러니 불가에서 깨달음을 방해하는 3가지 3 도구로 탐 진 치, 욕심내는 탐과 화를 내는 짐과 더불어서 어리석은 치를 꼽는 게 아닐까요? 흔히 프레임이라고 하면, 창문이나 액자의 틀을 말하지요.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관점이나 사고방식 지식의 수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인 최인철 교수는 자신을 바꾸고 싶다면, 마음이나 생각의 프레임부터 바꾸라고 하지요. 3월이면 새 학년을 맞은 학생들은 수업시간표며 수강신청서를 새로 받거나 짜게 되는데요. 그런 학생들처럼 진작에 학교를 졸업한 일반인들도, 이 기회에 보다 폭 넓은 독서, 인터넷 활용, 또 문화생활 체험 같은 것들을 계획하고 실천하면서요, 지식의 프레임 내가 가졌거나 다루는 지식이나 정보의 양을 획기적으로 바꿔보거나 발전시켜 보는 것도, 나를 바꾸는 굉장한 발전일 수 있지 않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3월 3일 방송>
2. “제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다 1(1-8절)”을 읽었습니다. 어제 일몰 시간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짊어진 고난의 의미를 묻고,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독일의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는 “요람과 무덤, 그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숙명>이란 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최고 부자를 비롯 이름 없는 촌로에 이르기까지 “왜 나에게 고통은 끝나지 않습니까?” 하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고통 그리고 아픔은 우리로 기도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인데, 3일 동안 묵상할 만큼 길고 깊은 그리고 폭넓은 묵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로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1-5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달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아들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희망하는 영광이란 우리들 인간이 노래하듯 말하는 권세도 부귀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바라고 바라신 영광이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일을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겨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그 소명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몇 사람 뽑아낸 제자들에게 알려준 일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내밀(內密)한 얘기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우리들이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십자가를 지려는 열망(?)이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성격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품고 있는 가장 깊은 과제를 나누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을 열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십자가로 향하는 뜨거운 열망을 아브라함에게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흘간의 걸음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가슴에 품고서 말입니다. 아들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뚜벅뚜벅 걸어갔던 모리아 산으로 가는 걸음 말입니다(창 22:2-6). 아브라함은 비통함을 간직한 사흘이었을 뿐, 그것으로 그의 역할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온 몸으로 그 두려움과 고통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길을 주님은 영광의 길로 이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십자가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알려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후좌우 사정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만인지상의 화려한 보좌 좌우편에 자리 잡는 꿈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는 철부지 제자들이었던 셈입니다. 자리를 고쳐 앉으며 묵상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부질없는 욕망에 붙들려서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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