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99호(2022. 9. 23. 금요일).
시편 시 101:1-3.
찬송 10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운 고향에 막 당도하게 되면, 추수하기에 바쁜 가을 들녘의 모습이 먼저 눈앞에 펼쳐집니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에 주위를 둘러보면, 콩 떠는 도리깨 질 소리, 고추를 말리고 있는 할머니, 옥수수를 묶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까지, 어느 것 하나 고향의 정경을 떠올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모습이지요. 명절 앞이라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실 줄 모르지만, 크게 변함없는 고향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놓입니다. 다른 건 다 변해도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둘 있게 마련입니다. 그 중엔 고향의 모습도 끼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갑게 달려 나와서 우리를 맞아 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고소하게 배어나오는 그 곳. 초록 들판이 뜨거운 햇살을 받아서 황금색으로 바뀌고, 밤송이는 알밤을 토해낼 듯 굵어지고 있는 그러한 정겨운 고향의 모습. 언제나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있는 풍경이 있지요. 고향하면 떠오르는 모습, 여러분은 어떤 게 있으십니까?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9월 23일 방송>
2. “욥의 두 번째 답변 :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죄책(1-15, 32-35절)”과 “욥이 중재자를 요청함(32-35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물론 욥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진술하는 첫 단락도 흥미 있는 주제임에 분명합니다. 한국의 간 큰 목사 한분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을 했는데(2019.12.10.), 17-18세기였다고 하면 화형에 처해질 신성모독죄에 해당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 이해를 한국교회가 귀를 막고 못들은 체 한다는 점입니다. 그에 비하면 욥의 하나님이해는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할만한 비교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욥은 9장 말미에서 중재자를 요청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제가 오래전부터 궁금해 오던 내용의 말씀입니다. 욥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향해서 얼굴을 돌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나님 면전에 서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아무개 목사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하나님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런 하나님 인식을 갖는 경험을 출애굽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출 3:5).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할 때에, 그 백성에게 준비시켰던 성결례는 가히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준엄한 일이었습니다(출 19:10-24).
그래서 욥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가 아니라, 중재자를 사이에 둔 교제를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까닭은 그의 친구 빌닷의 지적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인에 불과한 자신이 자신을 변호할 수도 항변할 수도 없음을 깨달은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중보(中保)라는 용어(메시테스/μεσιτης)를 사용하고 있는데, 헬라어 구약성경인 <LXX-70인역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딤전 2:5에서 이 중재자(仲裁者, 혹은 중보)를 한 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인간 사이에서 중보로 혹은 중재자로 소통을 잇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엄한 중보의 지위를 허물투성이들인 목사들이 차지해 버렸다고 하는 것이 분통을 터트리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간 큰 목사는 그 보다 한발 더 나아가고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나 말씀과 교회를 목숨다해 지킨 성인들이, 우리를 위하여 중재자로 나설 수 있는 듯 가르치는 것 또한 비 성경적이고 매우 위험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일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분명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고 밝히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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