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12(2022. 10. 6. 목요일).

시편 시 103:10-13.

찬송 4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조로 가곡을 만드는 경우 흔하지는 않습니다만, 찾아보면 적지 않습니다. 김성태 선생의 곡 <동심초><>, 이수인 선생의 <> 등이 시조로 만들어진 가곡이지요. 왕방연의 시조로 만들어진 오동일 곡 <고운임 여의옵고> 준비했습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놓다.”

    1976년 작품입니다. 산수에 대한 시와 시조에 즐겨 곡을 붙이는 오동일 선생의 작품이지요. 이 시조는 왕방연이 영월로 유배되어가는 단종을 압송해 갔을 때, 지은 것입니다. 폐위된 어린 왕을 외딴 곳에 유배시키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애달픈 심정을 냇물에 빗대어 노래한 곡이지요. 곡에서도 슬픔이 느껴집니다. 작곡가는 197611월 춘천에서 제1회 작곡 발표회를 가졌는데요. 강원도에 대한 시와 시조를 찾다가 이 시조를 가사로 선택해서 작곡을 했습니다. 당시 초연한 성악가가 바리톤 진용섭이라고 하네요. 회고적인 가락과 애상에 잠겨 있는 선율을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거나 감정이 잡히지 않는 곡은 쓰고 싶지 않고, 더군다나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작법도 자신의 성품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작곡가의 특징이 잘 배어 있는 노래가 아닌가 싶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105일 방송>

 

2. “욥의 마지막 독백3(1-23)”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독백을 들을 때면 그 사람의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듯 할 때가 있습니다.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것을 대학 강당에서 보았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었는데, 나무 한 그루가 설치돼 있고 그 아래 두 남자가 앉아서 서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불어로 고도는 Godot로 등장인물 두 사람은 이런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와야만 자신들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 희곡의 중심주제인 고도를 신이라느니, 죽음이라느니 구구한 해석을 하였지만, 베케트는 고독과 허무 사이를 배회하는 인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들 인간 실존의 비참함과 무기력함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등장인물들의 독백 때문일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 사이를 오가며 혼잣말에 힘을 더해 줍니다. “젊은 여인에게 눈이 팔려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었지.” “전능하신 분은 나의 걸어 온 길을 살피시고, 내 발걸음을 세시는 분, 내가 허황한 생각으로 살았다거나, 거짓으로 살았다면 바른 저울에 달아보시면 아시리라.” 자신을 돕는 남종의 인권을 짓밟았다면, 여종의 불평을 묵살했다면, 하나님이 심문하실 때 답변할 말이 없을 것을 알고 있다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과부들, 그리고 고아들을 모른 체 하였다 한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알고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욥의 독백 속에는 나는 황금만을 믿는다. 정금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를 자신의 신조로 삼지도 않았고, 재산이 많다고 우쭐거리지도 일확천금을 얻었다고 으스댄 일도 없었다 고백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청렴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도 모자로, 신문과 방송에 나팔을 불어대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동안 그런 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부정축재를 일삼았으며 마침내 물질 때문에 가족이 파탄이 나고, 사람들의 희망까지 망쳐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러나 욥은 따져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다짐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을 되짚으며 결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말에서 진정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욥의 위인 됨은 자신의 원수가 망하기를, 재앙이 내리기를 빈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길손을 집에서 거절하고 노숙하게 만든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독백은 그의 사람됨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자신을 의롭다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서만 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있는(코람데오/coram deo)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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