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47(2022. 11. 10. 목요일).

시편 시 106:19-22.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청각장애인이면서 시각장애인이었지만 그 장애를 극복하고 훌륭한 사회 복지가가 된 헬렌 켈러. 어릴 적 위인전기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헬렌 켈러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또 한 사람이 있지요. 에니 설리번입니다.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의 손에 사물을 쥐어주고 손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글을 가르쳤던 설리번 선생님. 그리고 그런 선생님을 믿고 힘든 과정을 거쳐 고난을 극복해 낸 헬렌 켈러. 두 사람의 만남은 참 복된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의 개성과 빛깔이 있지요. 그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찾아내 물을 주고 꽃을 피게 해 주는 사람. 그러한 만남이야 말로 사람과 인생과 세상을 바꾸는 복된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1111일 방송>

 

2. “잃었던 아들(11-32)”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 앞에 있는 <잃은 양의 비유><잃은 은전 비유>를 두고서 누가복음의 백미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이처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표현한 말씀이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잃었던 아들 비유>는 걸작 중의 걸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를 비롯해서 수많은 문학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때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는데,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암시한 아버지가 주인공이라고 해석하는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의 신학자 헐무트 틸리케가 쓴 책을 연세대학의 이 계준 교수가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 번역한 다음부터 그렇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민중 신학의 전도사 중 한 분인 서 남동교수께서 성경의 중심 흐름이라는 뜻의 “integrity”통전이라는 말로 번역했다며 흐뭇하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나는데, 어떤 단어 하나를 누가 처음 사용했느냐도 매우 중요한 역사라고 생각이 드는 새벽입니다. 아무튼 틸리케 교수는 1979년 뉴우런베르크의 <교회의 날/Kirchen Tag> 행사의 많은 강연 중 하나에 강사로 나섰을 때, 잠깐 쉬는 시간에 중인환시 속에 제가 앞으로 나가 한국에서 온 목사라고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사인을 받았던 추억도 떠오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는 너무도 유명해서 그 내용을 거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설교자들은 둘째 아들인 탕자의 고뇌에 찬 심정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입니다. 저의 부산 목회시절 주일 예배 강사로 오셨던 풀무원 설립자 원 경선 선생님은 탕자가 회개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묘사하기를, 17절의 그래서 제정신이 든 그는이란 구절의 영어 번역본을 인용하기를 “he came to himself”라고 몇 번이나 힘주어 말씀하셨던 추억도 생각납니다. 제 정신이 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탕자가 자기 자신을 찾았을 때 비로소 그는 회개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돌아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하고 중요한 대목이 탕자 자신의 뉘우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틸리케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 몹쓸 아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였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탕자에게 초점을 맞추려드는 대부분의 설교자나 신학자들을 응원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바탕에 깔려 있는 성경을 읽으면서 까지도,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끈을 놓치 않고 있다는 웃픈 현실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성경의 의도와는 너무 멀리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으니 성경을 보든 말든 무슨 힘이 생기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회개할 시간입니다. 역사를 읽을 때든 문제를 읽을 때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빠진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든 모두가 뻥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뻥치는 설교를 멈출 때입니다. 온통 뻥 뻥 뻥으로 도배된 세상입니다. 우리 교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3. 어제 50년 전 저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아산 집을 찾아 주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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