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75호(2023. 3. 18. 토요일).
시편 시 119:172-174.
찬송 42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인 슈만과 브람스가 좋아했던 작가 호프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어가 떠난 자리에서 음악은 시작된다고 말이지요.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성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예술이, 음악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거겠지요. 하지만 때로 언어가 음악을 더욱 빛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 가곡이라는 장르가 바로 그러한 예겠지요. 훌륭한 가곡은 한 편의 시를 낭송하거나,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곡의 특징을 잘 담아낸 작곡가 가운데 김동진이 있습니다. 김동진의 곡은 시가 지니고 있는 분위기를, 음악으로 잘 옮겨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으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우리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우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간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불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가리다.”
우리에겐 친숙한 작품입니다만, 성악가들은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광복 1년 전인 1944년 김동진은 만주에서 한 교향악단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극장 앞으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하나의 선율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선율이 뚜렷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싯구절을 곡에 넣어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선율을 잊을까봐 그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교향악단 연습실로 도착했고, 이내 오선지에 옮겨 완성된 곡이 바로 <내 마음>입니다. 우리 가곡을 대표하는 가곡 중 하나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3월 17일 방송>
2.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48-59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신화적인 책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몰몬경 처럼 하늘에서 어느 나무 밑 바위틈에 내려진 책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오해가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 창 1-11장의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7일 간의 말씀이나, 인류의 조상들 중에는 969살을 살았다는 므두셀라 같은 분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창세기 11장까지를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말씀이라고 분류합니다. 객관적인 기록을 갖기 이전의 시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 이전의 일들은 아무래도 신화적인 느낌을 줄만한 기록들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시대로부터는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분류합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의 역사는 일반 세계사에서도 비교할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중에 바로 이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의 나이 차이를 들어서 예수를 거짓말 장이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집어 치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셈을 하고, 당장 피부로 느끼는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 가령 얼토당토 않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한없이 가볍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제 생각에 맞지 않으면, 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저의 오랜 친구 가운데는 역사의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주변 사람들이 하는 소위 저자거리에서 떠도는 얘기에 온 정성을 기우립니다. 굴곡진 지나온 역사에는 전혀 기억하지 않을뿐더러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멀리 내다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현상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유대인들은 주전 2,100년경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쉰 살도 안 된 예수님을 직접 비교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비교 불가한 두 사람의 역사적 차이점 앞에서 다른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고민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시간적인 길이로써(Χρονος/크로노스)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관심사인 역사적 순간에(Καιλος/카이로스) 대한 의미를 찾아봤어야 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길이로써의 시간에 관심을 쏟고 있지만(Χρονος),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시점(Καιλος/ 갈 6:9)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눈을 떠 하나님의 깊고 넓은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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