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42호(2023. 5. 24. 수요일).
시편 시 140:6-8.
찬송 20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예수가 당시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당신 식탁에 초대했다는 기록이다.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은 거지나, 병신, 세리 창녀들로 당시의 계급사회에서는 최하층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감히 예수를 초대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죄인 신분인 세리 삭게오에게는 예수께서 자청하여 오늘은 너희 집에 가서 식사를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초대할 집도 대접할 끼니도 없는 거지나 부랑자들은 자기가 초대받은 식탁에 같이 초대하고, 삭게오처럼 돈은 있으되 소외당한 이에게는 당신을 초대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 죄인과 소외계층은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아 동등한 대접을 받음으로써 위로와 용서의 은총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과 가난뱅이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방법은 바로 식탁을 같이 하는 거였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는 정말 그랬을까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편이다. 그러나 가장 천한 신분의 죄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하나가 되어 우의를 다졌다는 기록은 4복음서에 공히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니 아마 실화일 것이다. 실화일 텐데도 너무 아름다워 꼭 꾸민 이야기, 소설처럼 읽힌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소설 같다고 폄하하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나는 내가 소설가여서인지 꼭 정말 있었던 일 같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처럼 진실한데, 아름답기까지 한 이야기를 소설 같다고 생각한다.”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p.85-87.
2. “멜기세덱의 사제직2(11-17절)”을 읽었습니다. 한 때 진화론에 대항하는 창조론이 강조되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창조 과학회>라는 단체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독교의 주류인 로마가톨릭교회와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화론을 하나님의 창조설에 포함시키면서 말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무리하다는 주장을 해 왔습니다. 2천년 들어서면서 줄기세포를 통한 생명 복제가 가능해졌다는 것에서 큰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창조의 시발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근접하기에는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시사 하는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 바벨탑 사건이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서 하늘에 닿는 탑을 쌓겠다는 시도였는데, 결국은 산산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완전 창조냐 진행 중인 창조냐의 논란은 필요하다 싶지만,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피조물이 자신의 조물주를 이겨보겠다는 시도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설과 이에 대한 우리들 인간의 이성적 내지는 과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노력은 평행 이론으로 두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론의 사제제도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새로운 사제제도인 멜기세덱의 완전함을 묵상해 보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아론보다 멜기세덱이 적어도 몇 백 년은 앞선 인물이지만, 사제제도에 관한한 아론의 레위 지파의 역할이 훨씬 더 일찍 제도화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주장하는 멜기세덱의 사제 제도는 하나의 예표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서가 말씀하고 있는 다른 예표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의 사제 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들 인간의 관행과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멜기세덱의 사제 제도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성취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대사제로 등장하는 때문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사제가 되신 것은 인간이 정한 율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고, 불멸의 생명의 힘을 따른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16절).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레위 지파가 거행하는 제사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효력이 있는 것에 반해서,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제사는 완전하고 영원한 효력을 가진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근본도 모르는 멜기세덱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앞서 구구절절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니 하는 우리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관심은,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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