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38(2023. 5. 20. 토요일).

시편 시 139:19-21.

찬송 4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문학에 있어 시라는 장르는 무척이나 특별합니다. 시를 접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서 늘 그 의미가 변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연시가 되기도 하고요. 때로는 시 안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기고 합니다. 시를 읽고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는 일이겠지요. 많은 사람 앞에 발표 되고난 후라면, 이미 그 시는 시인의 것만은 아닐 테니까요. 시인들은 다만 시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몰두할 겁니다.

    “지울수록 사랑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물입니다. 지울수록 사랑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물입니다.”

    수녀 이해인은 1976년 시인으로 데뷔합니다. “기도는 나의 음악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민들레의 영토]로 주목받은 후에 [작은 기쁨], [작은 위로] 같은 시집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따뜻한 시들을 선보여 왔습니다. 이해인의 시는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늘 뚜렷합니다. 시를 읽는 이들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따뜻한 손으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그런 기분을 주는 것 말이지요. 삶의 작은 것에서 위로를 얻고 순하게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그러한 힘이 그의 시에 담겨 있습니다. 이 시를 통해서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사색에 잠 겼던 유년시절의 떠올렸다는 작곡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해인 시, 김종덕 곡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520일 방송>

 

2. “배반에 대한 경고(5:11-6:12)”을 읽었습니다. 상대의 신의(信義)를 저버리는 것을 배반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숱한 시련과 시간이 쌓여 있는 관계일 경우에는 그 배반의 아픔과 상처는 아물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 오랜 시간 그리고 그 험난한 역사를 동고동락해 온 사람을 배반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가령 죽음에 이르는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일, 하나님을 믿는 일과 세례와 안수,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제대로 확립해 두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살필 수는 없고 한 둘만 얘기한다면, 가령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두 쪽이 난다해도 바뀔 수도 변할 수도 없는 진리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들의 욕망이나 가치들을 올려놓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무엇이라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잘못으로 생긴 죄를 죽이는 행동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새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때마다 죄와 싸워야 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기억하는 크리스천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비관주의자들이나 절망주의자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조롱할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쪽을 택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는 삶을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처럼 절망적인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했던 것입니다(7:24). 그리고 이어서 고백합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니까 사도는 자신이 이중인격자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음 따로 육신 따로 행동하는 형편없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머물러 있다면 초보적인 교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걸음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과 달리 육신이 행하는 어리석은 삶이란 죄가 이끄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고, 죄 아래 살고 있는 비참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속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리의 공로나 선행으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로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는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가진 이들을 의인으로 받으신 것입니다(15:6).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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