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96호(2023. 7. 17. 월요일).
시편 시 4:5-8.
찬송 44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형제간의 우애는 누구에게나 각별한 것이지요. 또 그 가운데서도 무척 돈독하고 애틋한 관계를 꼽는다면, 아마도 누나와 남동생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매간의 정이라는 것이 특별하지요. 형제간의 동등하기보다는 마치 엄마와 아들 터울이 그게 크게 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지요. 조실부모했거나 부모님이 연로해서 자식을 살뜰하게 챙기지 못했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지요. 모두 장성하고 출가를 한 이후에도, 누이는 남동생에게 문득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미당이나 소월, 초정 김상옥 같은 이가 시를 통해 그려낸 것처럼 말입니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이 삼삼 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검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누나.”
봉선화 꽃물을 들이는 누이의 모습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1939년 발행된 [문장]지 9월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이지요. 시인 김상옥이 발표한 첫 작품입니다. [문장]지에 김상옥을 추천했던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이러한 추천사를 남겼습니다. “이런 정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는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이지요. 같은 시를 두고 작곡가 윤이상이 작곡한 또 하나의 가곡에는 제목이 편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예술적인 탄압마저 겪어야 했던 두 예술인들의 당시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지요. 김상옥 시 황철익 곡 <봉선화>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16일 방송>
2.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54-62절)”을 읽었습니다.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올곧은 신념과 한결같은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신념을 저버리고 신앙을 포기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서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까요? 오늘 본문에는 배신이 예고되었던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모르고 한 순간의 욕심이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해서 실수로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것도 그런 배신을 미리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보짓을 했을 때는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저런 연유로 어리석은 배반과 배신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뒤늦게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문제는 그 회개가 없을 경우입니다. 아니면 그 허물들을 감추고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배신과 배반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삼을 만한 베드로를 주목해 보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도 가고, 죽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22:33). 흥미로운 관찰이 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예고와 베드로의 행적이 궁금합니다. 대제사장의 뜰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고, 주변에는 여러 사람들이 불을 쬐며 끌려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왕설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관저에서 일하는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살피더니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라고 대답합니다. 얼마 뒤에 어떤 사람이 베드로를 빤히 쳐다보며,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라고 하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서 또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오.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하자, “여보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베드로가 대답하자 닭이 울었는데, 그제서야 베드로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제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란 배신의 삶을 사는 족속인지 모릅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둘째는 사랑하는 이들을 배신하고, 셋째는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배신하면서 말입니다. 배신을 밥 먹듯 하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절실한 형국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는 중요성이란, 매일 회개하는 것과 함께 매일 중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것, 세례의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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