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74호(2023. 10. 3. 화요일).
시편 시 22:1-3.
찬송 3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잘 받지 못하는 곳에서, 의외의 풍광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출근길과 퇴근길에,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기 바쁜 이곳 여의도가 그렇더군요. 올림픽 도로에서 여의도로 빠지는 길목 국회 의사당 뒷길에는 가을에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늘상 길게 자란 잡초 밭처럼 보이는 곳입니다만, 가을이면 그곳이 새로운 풍경을 우리 앞에 던져 줍니다. 도심 속 무척 너른 갈대밭으로 말이지요.
“나 흔들리는 갈꽃 같이 그렇게 살리라. 이름 없이 욕심 없이 나, 들꽃 속에 묻혀 뒹굴며. 길가는 나그네의 미소로 피리라. 나 흔들리는 갈꽃 같이 그렇게 살리라.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나 세월의 속삭임을 벗 삼아, 호숫가 바위 곁에서 떨림으로 노래하리.”
산등성이 억새가 만추의 서정이라면, 초가을 물가에는 갈대가 있어서 더욱 더 낭만적입니다. 특히 날씨가 추워지는 즈음에, 붉은 낙조 아래 일렁이는 갈대밭의 풍광은 정말 장관이라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계절의 서정이 듬뿍 담긴 광활한 갈대 밭,해질 녘 그 황홀한 광경은 대지를 박차고 오르는 철새의 군무와 더불어서, 황금빛 한 폭의 수채화라는 평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휘청 이거나 꺾이지 않고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꽃은, 유약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강인함을 느낄 수가 있지요. 또 그 모습에서 우리는 생의 진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한숙 시 이 종록 곡 <나 흔들리는 갈 꽃 같이> 들려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0월 3일 방송>
2.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다 2(17-26절)”과 “아합이 뉘우치다(27-29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어느 조직신학자는 “십계명은 제1계명을 어기는 순간 십계명 전체가 무너져버린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쉐마(들으라/신 6:4-9)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예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든지 바깥 활동을 하든지, 한 분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우상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포함 우리들 크리스천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입으로 조아리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하루 종일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맘몬이라는 우상, 자녀라는 우상, 권력과 재력이라는 우상, 그 밖에도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상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숭배의 표상처럼 알고 있는 아합왕을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만 다행이게도 아합은 엘리야를 통해서 전해진 저주의 말씀을 듣고서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제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킹제임스 역본에서는 “He came to himself.” 라고 했는데, NIV에서는 “He came to his sense.”(눅 15:17). 그러니까 제정신을 차릴 때가 바로 회개하는 일생일대의 은총의 때라고 말입니다. 아합이 그랬습니다. 아합이 회개한 것입니다.
제가 많이 미워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동급생이었는데, 마을에서도 두 집 건너에 사는데, 저는 물론이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 화를 푸는 방법이었고, 어쩌면 살아가는 방식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최고참인 저를 못살게 했던 남한산성 출신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를 총으로 쏴서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민간인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까지 설교를 하고 있었지만, 그 미움은 마음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괴롭힘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든이 가까운 지금도 보기 싫고 말하기 싫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합처럼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정신을 차릴 때가 오리라 희망을 걸고 계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정신을 차리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금식에 들어간 아합을 보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전에는 이 재앙(”네 후손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이스라엘에 있는 아합의 가문에 속한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씨도 없이 죽이리라.“/왕하 21:21)을 내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자 아합이 제정신을 차릴 때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아합처럼 살아가는 우리들도 용서하시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용서란 말은, “지워버린다. 기억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우리도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할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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