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89호(2024. 1. 26. 금요일).
시편 시 41:7-10.
찬송 3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시인을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감정을 그저 대필하는 사람일 뿐이라.” 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시인들의 모든 시어는 시인만의 것이 아니라,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한 순간, 시를 쓴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서 스스로 시를 썼다는 기억조차 지워내야 한다. 이렇게도 말을 했는데요. 그에 말에선 시를 대하는 순수함, 숭고함까지도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그가 바로 시인 안도현입니다.
“일찍 나온 초저녁별이 지붕 끝에서 울기에/ 평상에 내려와서 밥 먹고 울어라 했더니/ 그 날 식구들 밥그릇 속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찬 없이 보리밥 물 말아 먹는 저녁/ 옆에 아버지 계시지 않더라”
마당 밥이란 단어가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평상에 나와서 먹는 밥을 시인은 마당 밥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시를 음미하면서 곡을 듣다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소박한 그림 하나가 떠오르는 듯도 하고요. 푸근하면서도 조금은 서글픈 심상도 전해집니다. 시인 안 도현의 글을 두고서 한 문학평론가는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애틋한 글은 본적이 없다 평하기도 했습니다. 눈송이가 강물에 다 사라지는 모습에서도 모성을 떠올릴 만큼 시인은 생명이 지닌 온기를 섬세하게 포착해 내곤 했지요. 얼마 전 안 도현 시인은 글이 아닌 시인의 모습으로써의 모습은 앞으로 어떤 것을 통해서도 들어내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글을 쓰는 이로써의 뚝심과 우직함이 왠지 나쁘게 보이지 만은 않습니다. 안도현 시 이 영례 곡 <마당 밥>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1월 27일 방송>
2.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1-15절)”을 읽었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기준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 때 초대 교회 교부 타티아누스가 주후 170년경에 썼다는 <디아테사론/Diatessaron>은 네 복음서를 하나로 종합한 시리아 역본으로, 서로 다른 복음서의 차이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 해서 넷을 하나로 묶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본은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4복음서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는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가령 100명의 교우가 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고 합시다. 설교가 끝난 후 그 100명의 교우들께 설교에 대해서 전체적인 느낌과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물었을 때, 그 청중들은 놀랍게도 100명 가지의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4복음서의 가치도 그렇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의 삶의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 감동과 아쉬움은 각색/各色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느낌과 감동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고, 왜곡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죽을 쑤었을 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가 될 수 있다 위안을 받는다 했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 일화는 4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공관복음서(막, 마, 눅)와 요한 복음서를 비교해 보았는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공관복음서는 모두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시는 것에 반해서 요한복음서에는 그런 말씀이 없는 점이고, 둘째, 요한복음서만이 배고픈 이들에게 2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제자 빌립이 말하고 있으며, 셋째, 요한복음서만이 한 소년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떡을 제공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요한복음서에서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견해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어른들의 관심사와는 달리 어린 소년의 관심사에 주목을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에 대한 진지한 자세입니다. 오늘은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모르게 어른이 된 이후로는 질문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대하는 자세가 물질 이외에 다른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어린 아이들에게 순수성을 잃지 않은 장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도록 격려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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