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1420(2005.4.6. 수요일)

시편 7:11-17.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앞,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다가 그 남자를 만났습니다.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대낮에 남자는 지하철 2호선 시청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광고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그 남자가 나눠주는 종이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광고물을 나눠주는 사람들의 눈빛은 결코 그 남자의 눈빛처럼 간절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일 것 같다. 추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여자 아이, 나이는 당시 4, 단발머리에 머리핀을 꽂고 있음, 상의는 빨간색 점퍼, 하의는 분홍색 바지, 하얀색과 분홍색이 섞여 있는 운동화를 신고 있고, 신체적 특징으로는 목뒤에 검은 점이 있음. 발생일자는 2004321.> 남자가 나누어주는 종이에는 아이의 사진과 함께,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남자는 이 종이를 주면서 받는 사람을 보지 않고, 엄마 손을 잡고 서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 남자에게 상처를 준 것입니다. 그 남자에게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사람일 겁니다. 그리고 제일 미운 사람은 자신이 나눠준 종이를 한번 쓰윽 훑어보지도 않고 버리는 사람일 겁니다. 부모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직 뭔지 모르는 아이, 요즘 하루가 다르게 호기심이 늘어가는 아이가, 그 종이를 달라고 조릅니다. 종이는 주지 않고 대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에 힘이 주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남자가 나눠준 종이를 열심히, 꼼꼼히,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애를 쓰며 읽어내려 갔습니다. 꽃밭에서 환하게 웃고 서있는 아이를 쳐다보며, 그 아이가 탄생하던 날, 그 아이가 처음으로 걷기 시작하던 날, 그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 아빠!”라는 말을 했던 날, 그 아이의 생일날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혹시 마주치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기를 기도하며, 그 아이의 얼굴을 눈으로 가슴으로 사진을 찍어 저장해 둡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5331일 방송>

 

2.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일까요? 그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그 모습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불타는 사랑의 모습들도 그렇지만, 노년의 그윽하고 애잔한 사랑의 모습 또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주님의 중보기도는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으로 새겨질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기도의 모습을 보이신 때문일 것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이었다고 말씀(23절 공동번역)하고 계십니다.

사랑을 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바치는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내가 니꺼야?” 하는 요즘 세상에서, 사랑이란 단순히 감정의 기복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헤아림이고 관심으로, 상대의 마음을 가지는 것일 텐데,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될 때 문제가 시작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 주님 역시 이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26절 공동번역)하고 계십니다.

젊은 두 남녀가 서로에게 사랑의 약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필요할 때마다 손이 되고 발이 되어주며, 눈이 되고 입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약속이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빈 약속을 한 것일까요? 그들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뚜렷할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 아닐까요? 그래서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존중되고 이해되는 것을 전제로 할 때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은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 깨닫는 사람이라면 불행 중 다행이겠습니다만, 나이가 들수록 더 자기 고집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같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로 사랑하는 상대의 꿈과 생각을 헤아려줄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3. 어제 막내 제수씨가 차비하라고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길 가에서 실랑이를 할 수 없어서 받고 말았습니다만, 저 보다는 열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서 차비를 받는 것이 낯설었지만 너무 기뻤습니다. 막내가 저보다 더 넉넉한 마음을 가졌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어 줄 수 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는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철부지로만 생각해 왔던 막내에게서 보았으니까 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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