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7(2000.11.4, 토요일)
성경말씀 : 잠 28:1-4.
찬송 : 327장.
제목 : 죄에서 떠나라.
1.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 “어둠 속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해 묵은 선전 글귀가 아직도 그대로 붙어 있는 시골을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 때문에 죄인을 찾아내는 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육군에 복무하다 1967년 여름 첫 휴가를 나왔고, 꿈꾸는 대학을 구경하고 싶어서 서울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음속에 꿈을 담아 넣어 두기만이라도 한다면 시험공부를 하는데 큰 힘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왕 온 김에 중앙청이며 이런 저런 구경도 좀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로를 따라 안국동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30미터 전방에 헌병이 서 있지 않습니까? 헌병을 보기가 무섭게 저는 뒤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오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고 있었지요. 내가 왜 이러지? 그럴 필요 없는데. 마음속으로는 그런 말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저 헌병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그런 행동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됐겠습니까? 헌병은 곧바로 저를 불러 세웠고, 헌병 초소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질문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정당한 휴가병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기를 피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당시 어머니에게서 받은 쌈짓돈 300원을 기부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심리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겉으로 보아선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만, 마음으로는 제가 헌병을 미워했고, 싫어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제 악한 감정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셈이지요. 그리고 그 헌병 역시 그 점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마음을 들킨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3. 죄라는 말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많이 사용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가장 많은 낱말일지도 모릅니다. 죄를 안고서는 마음이 편안할 수도 없고, 하는 일도 즐거울 수 없으며, 일의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이기에 우리들 인생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까? 성경은 죄를 “표적을 일탈한 화살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뜻을 가진 낱말을 죄라고 합니다. 목표를 빗나간 화살, 제구실하지 못하는 일들,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것, 등 등.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죄와 무관하십니까? 저는 어제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추석에도 내려가지 못했던 고향,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누워 계신 산소도 둘러보고 싶고, 저희 아홉 형제 자매의 맏이 되는 형님이 낼모레 장로로 장립하게 되셨고, 제 바로 밑 제부가 권사님이 되셔서 축하도 드려야 겠기에 겸사 겸사한 오랜만의 시골 방문이었습니다. 고향 길을 걸으면서, 부모님의 묘지에서, 그리고 형제들을 만나면서 저는 ‘내가 죄인이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부모님을,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 은혜까지 깡그리 잊어버린 체 살아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힘들게 살고 있는 누이가 있는데, 나 살기 바쁘고 힘들다고 모른 체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제 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해 아래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부정하면 할수록 죄인입니다. 죄는 연쇄적으로 죄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분명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들을 다 씻어낼 수 있는 듯 가르칩니다. 이른바 좌선(坐禪)을 통해서 108번뇌를 다 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 하나를 내 쫓아내고 나니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들어오게 된다(눅11:24-26)고 말씀합니다. 죄악을 물로 씻어 버릴 수도 불로 태워 버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4. 방법은 있습니다. 악을 내 몰아내는 방법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들이는 전향적인 방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려는 자세를 소극적이라고 한다면, 주님을 모셔들이는 일은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모셔다 놓는다 함은, 주님께 모든 주도권(initiative)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 부른 찬송 327장은 너무도 적절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함께 불러 보시길 바랍니다.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영접하며, 새 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마땅히 할 일을 즐거움으로 짊어지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의 발버둥치는 노력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고, 주님의 생각을 겸손히 듣는 일입니다. 매 순간마다 그런 자세를 가져 보십시다. 얼마나 감사할 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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