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493호 (2008. 3. 14. 금요일).
시편 시 34:11-16.
찬송 17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카우보이 영화를 찍은 후, 배우 러셀 크로가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군요. “카우보이 옷을 입고 총을 쏘아대면서 몸만 어른인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일은 모조리 다 했다. 너무나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대목을 읽는데, 요즘까지도 카우보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카우보이 영화의 구성이란 대개들 참 비슷비슷하지요. 우리의 주인공은 늘 말을 타고서 혼자 고독하게 방랑을 하고, 또 혼자서 겁쟁이인 악당 패거리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목격하면, 혼자 힘으로 그들 모두를 물리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장 기본적인 카우보이 영화의 구도를 살펴보면, 왜 “몸만 어른인 꼬맹이들이 좋아할 짓을 다했다.” 이런 표현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지요. 고독한 방랑, 이 한 가지만 꼼꼼히 살펴봐도, 어른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누리기 힘든 사치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사실 그냥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는, 일상의 고리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서로 맞물려 있는 줄 잘 모르고 지나칠 수 있지만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꿈꿀 때나 시도하려고 할 때는 조금 다르지요.
긴 방랑이 아니라, 단지 며칠간의 짧은 여행을 좀 하고 싶어도, 당장 과외로 지출되어야 할 여비, 또 미리 해 두어야 할 일들이며, 처리해야 될 서류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발 길이 묶이곤 합니다. 그러니 어른이라면 고독도 방랑도 아주 사치스러운 단어라는 것 실감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꿈 때문에, 마음이 따끔거리는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을 위한 진통제 같은 것도 분명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몸만 어른인 꼬맹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그런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져 왔고, 앞으로도 만들어 질 것만 같습니다. 카우보이나 마법사들, 초현실주의 적인 영웅이 나오는 영화나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아주 잠깐이나마 어른 모드(mode)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비상구 역할을 해 주기도 하니까요.<KBS FM 1, FM가정음악, 2008년 2월 12일 방송>
2. 제가 참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지난 2월에 가진 저희 교회 겨울 학생 동계 수련회의 주제는 <주는 토기장이 우리는 그릇>이었는데, 저는 롬 9:19-24를 본문으로 폐회설교를 했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사순절의 첫날인 성회 수요일에 의식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이마에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를 찍어 주며, “그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말해 주던 것을 기억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일 뿐인 흙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보잘 것 없고 하찮게 보였던 우리들 인간이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필요한 그릇들이 되었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밥상에 오를 밥그릇도 되고, 하나님 거실의 꽃병도 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각양각색의 그릇들로 빚어진 우리들, 그 그릇의 크기가 크던 작던, 아름답게 색을 칠했던 아무런 색깔이 없던,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모든 그릇은 만든 토기장이의 의도대로 그 용도에 맞게 쓰이기를 희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희망대로 자기를 관리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귀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그릇들이, 자신의 주인인 토기장이에게 어떤 항변이 가당치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항명이며, 어불성설이 될 뿐입니다. 그릇이 먼저 생각할 일은,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왜 이런 존재로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내 존재에 걸맞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어떤 처녀가 맞선을 보고 나온 후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하지요. “엄마, 나를 낳으려면 조금 더 키가 크게 낳지 그랬어요?” 그 때 그의 어머니는 “글쎄 말이다. 나도 네가 큰 키의 예쁜 딸이기를 바랬는데, 내 마음대로 안 되었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의 어머니도 나를 낳은 게 아니었습니다. 나를 낳은 분은 하나님 창조주이시고, 나의 어머니는 그 대리자였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록 깨지기 쉽고, 마음에 차지 않은 질 그릇 같은 우리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들 안에는 보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그리스도가(4절) 바로 우리들 몸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는 한은 말입니다(10절). 주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아주 아름답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질그릇들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기뻐하실 역할을 힘써 하는 것으로 보람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3. 저는 오늘 저녁차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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