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492(2008. 3. 13. 목요일).

시편 시 34:6-10.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함께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포옹이 아닐까 싶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라는 피카소도 그래서, 그의 창작생활 초부터 말년까지, 포옹하고 있는 젊은 남녀의 모티브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무수히 반복해 그렸던 게 아닌가싶은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포옹장면, 2002년 월드컵 때 박지성 선수가 골을 성공시킨 뒤에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안기던 그 장면도 있겠지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가 아닌 이상, 서로를 끌어안는 일을 그렇게 흔하게 하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길을 가다가 혹은 전철 안에서, 어린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훈훈해 지는 까닭은 어쩌면 우리가 포옹이라는 마음의 표현을, 평소에 그만큼 아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끼는 그만큼 거기에는 더욱 더 소중한 의미가 담기게 되니까 말이지요.

   스페인의 어느 평범한 가정,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아 부딪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해서 자꾸 야단을 치게 됐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께 반항하며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세계의 수도> 라는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얘기인데요. 아들이 가출해 버린 뒤로 괴로워하는 아버지는 마침내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파코야, 모든 걸 용서할 테니 그만 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라.” 그러면서 아버지는 네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다음 날 정오에 어느 장소로 나오라고 밝혔는데요. 그런데 다음 날 정오, 약속했던 그곳에는 수백 명의 청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스페인에서 파코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라는데요. 파코라는 이름의 그 청년들 모두가, 아버지와의 화해를 그렇게 고대하고 있었다는 그런 얘기였지요. 그런가 하면 셜록 홈즈라는 명탐정을 탄생시킨 작가 코난 도일은, 어느 날 런던의 사교계의 거물 12명에게 익명으로 다 탄로 났다. 빨리 도망가라.” 라는 내용의 편지를 장난삼아 보냈더니, 다음날 그 12명의 거물들이 모두 런던을 빠져 나가고 없었답니다. 어떤 비리나 부정, 혹은 불륜 같은 것들을 저지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 탄로 났다는 그 말에 그렇게 놀라서 달아날 필요가 없었겠지요. 평소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던 코난 도일도, 당시 사회의 지도자였던 사교계의 거물 12명이 하나같이 그런 일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아마 그 때 영국 정계에도, 부정과 비리가 많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용서를 받고 싶었던 청년 파코들의 얘기는 아주 현실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헤밍웨이가 지어낸 픽션이었고, 반면에 모두가 비리와 부정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그 거물들의 이야기는, 19세기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더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200년 전 코난 도일이 보냈다는 그 익명의 편지를, 지금 우리 정치인들에게 보내면 어떨까요? “모든 것이 다 탄로 났다.” 이런 익명의 편지를 받아도, 전혀 거릴 것이 없는 그런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탄로가 난다고 해도 문제 될 만한 그런 일과는 아예 인연이 없는, 그런 분들이 우리를 이끌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우리 서로가 정말 따스한 마음으로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36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공동번역]을 읽으시면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7-11절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은 돌 판에 새긴 문자로, 결국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인데, 모세가 그것을 하나님께 받을 때, 비록 잠깐이었으나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처럼 문자의 심부름꾼도 영광스러웠다면,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우며,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다면,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은 얼마나 영광인가? 우리가 가진 영광은 엄청난 것인데,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한 것이냐고 말씀합니다. 저는 가끔 왜 성경을 어렵게 번역했는가 하는 데서 화가 나곤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어려운 말로 된 성경번역본을 읽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정확한 번역이 먼저겠지만, 이해가 안 되는 정확함이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계속 12-18절을 공동번역으로 요약합니다. 우리는 이런 확신 속에서 일합니다. 우리가 모세처럼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유대인처럼 옛 계약들을 읽으면서도 그 너울이 가림막이 되어서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때문인데, 그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너울로 가려지게 하나, 주님께로 돌아갈 때 벗겨집니다. 이 주님은 성령님으로,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참된 평화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70년대 많이 불렀던 저의 노래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불평불만과 환멸 가득찬 이 세상에,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맛보았는가?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참된 평화, 참된 자유, 나는 이것 위해 사는가? 불평불만과 환멸 가득찬 이 세상에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2절 가사는 서로 믿는 세상 된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