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496호 (2008. 3. 17. 월요일).
시편 시 35:6-10.
찬송 2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또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지난밤의 달콤한 꿈같은 것은 벌써 다 잊은 듯, 조금이라도 남에게 뒤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 남들과 같이는 돼야 한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새삼 낯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모모]로 유명한 작가 미하일 엔데의 유고작 [망각의 정원]은,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지요.
소설 [망각의 정원]속에는, 모든 것이 똑 같기만 한 <놀음>이라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거기에선 집과 거리, 심지어 사람들의 모습마저 모두 같고, 생각까지 같아야 함으로 꿈꾸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딸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학교는 어땠니?” 그러자 딸 소피 앤은 대답합니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어요. 제가 꿈을 꾸었기 때문 이예요.” “뭐라고? 꿈을 꾸었다니?” “왜요 엄마. 전 늘 그랬잖아요? 전 꿈을 꾼다고요.” “원래 그랬다니 너 좀 이상하구나. 머린 또 그게 뭐람, 거울을 보고 머리를 좀 손질해라. 그러면 너도 남들하고 같아질 거야.” 남들과 똑 같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와 똑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는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녀 소피에는 계속 의문을 품습니다. 그녀는 남들과는 다른 빨간 색의 머리칼을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로 올려 묶고 다닐 분 아니라, 그곳 놀음 시에서는 금지하는 꿈을 자주 꾸곤 하지요.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도 혼자만의 꿈나라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 앤은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까지 살던 곳과는 다른 이상한 정원으로 들어섭니다. 그 정원에는 알록달록 반짝이는 빛깔의 모래사막이 펼쳐져 있고, 매 순간마다 빛이 나는 이상한 모양의 식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지요. 자신이 바라는 대로 모양을 바꾸는 집이 있는가 하면, 그 집의 현관문은 저절로 움직이는 그런 환상적인 세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곳에선 모든 걸 너무 쉽게 망각해 버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잊고 싶은 것을 잊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기억하고 싶은 것까지 모두 망각해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일 텐데요. 거기에서 소녀는 몽유병에 걸린 어린 황제와, 머리에서 꽃이 자라는 꽃무늬 부인과 못생겼지만 울보 감자 등을 만납니다. 꽃무늬 부인은 모든 것이 똑 같아서 질서정연한 놀음이라는 도시를 부러워하고 있었지요. 소녀 소피 앤이 살고 있던 바로 그 도시를 동경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피 앤은 모두가 제멋대로인 망각의 정원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어 합니다. 질서정연하지만 꿈을 꿀 수 없는 <놀음> 시와 끝없이 변화하는 자유가 있지만, 예측할 수 없고 기억도 할 수 없는 망각의 정원, 그 두 곳 가운에 과연 어떤 곳이 더 행복한 곳일까요? 망각의 정원을 여행하게 된 소피 앤의 모험담은, 바로 그런 우리 모두의 의문에 해답을 찾기 위한 색다른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남들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놀음 시 사람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는 사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꿈꾸기를 계속하고 있고, 그 꿈과 함께 우리의 미래가 열린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런가 하면 우린 때때로 또 그 소녀처럼 망각의 정원을 헤매기도 하고, 또 그곳의 법칙처럼 많은 것을 망각하며 살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 망각의 정원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면 아줌마도 저를 곧 잊게 될까요?” 라고 소피 앤이 마지막으로 묻자, 꽃무늬 부인이 이렇게 말하지요. “아니, 난 너를 잊지 않아. 너에게는 이름이 있지 않니? 만일 누군가가 이름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단다.”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되어 있는 망각의 정원에서도, 이름을 가진 존재에 대한 기억만은 결코 잊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참 아름다운 희망처럼 느껴집니다. 이 봄,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꽃들이 차례로 피어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네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년 3월 13일 방송>
2. 참 다행이지요? 고린도 전서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는데, 고린도 후서 한 복판이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이제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어서 해 본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위로”라는 말이 불과 일곱 절 밖에 안 되는 본문에서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시작으로, “위로에도 그러한 줄을 앎이라”까지 말입니다. 위로라는 말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본래 위로라는 말은 파라칼레오(parakalew)로 쓰였는데, “곁으로 부르다”, “정답게 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곁으로 불러내는 일이 위로입니다. 그리고 정다운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일을 말합니다.
제가 요즘 마이클 호튼의 책들을 읽고 있다는 말씀 드렸지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면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 호튼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성경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에 눈을 뜨게 해 주는 신학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깊이에 이르기도 전에 우리들의 삶의 현상에 붙잡힌 때문이 아닙니까? 조금만 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린다면 정말 큰 힘과 위로를 얻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위로의 얘기들을 들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다가서서 우리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어 하시는데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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