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91호(2012. 4. 20. 금요일).
시편 143:7-8.
찬송 15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보니 한 달 동안 다섯 나라에서, 학생 친구들이 번갈아 우리나라를 찾아왔습니다. 거의 한달 내내, 외국인 손님을 맞고 보내고 또 맞이한 겁니다. 사람들이 게스트 하우스를 차렸냐고 할 정도였지요. 그렇게 한 달을 지내는 동안 짐작대로, 나라에 따라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은 문화적 차이를 발견하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괜한 선입견이나 오해일 뿐, 오히려 세상 사람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가령 독일에서 온 20대 친구들이 머물 때였습니다. 자신들이 전날 밤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아버지와는 아침에 인사를 하게 됐지요. 그런데 거실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던 그들에게 아버지가 악수를 청하자, 그들은 앉은 채로 손만 내민 채 악수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태도이지만, 서양에서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으니 문화적 차이인가 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모습은 동서양을 떠나 별로 보기에 좋지 않다,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밥을 먹던 독일 친구들이 말합니다. 아침에 아버지께 죄송하다고요. 악수를 청할 때 일어나려고 했는데, 한 친구는 거실 바닥에 처음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았던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지 못했고, 한 친구는 일어나던 팔꿈치에 안경이 깨질 찰나여서 정신이 없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싶었습니다. 사소한 문화 차이는 있을 지언정,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는 세상 어디서나 비슷할 터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일본에서 온 친구는, 집에 들어올 때마다 벗은 운동화 두 짝을 위아래로 겹쳐서 놓곤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일본인으로써는 드물게 키가 2m에 가깝고 신발도 항공모함만큼이나 컸지요. 그러니 너무 큰 신발 때문에 현관이 비좁아질까봐, 위 아래로 겹쳐 놓은 것이었습니다. 지내고 보니 사람을 차이나게 하는 건 나라별 문화 차이보다, 오히려 개개인의 성격차이나 생활태도 습관차이가 더 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3월 2일 방송>a.
2. 베드로 사도가 고난을 낯선 주제에서 오히려 낯익은 주제로 취급하고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들 삶의 바탕에 깔려있는 고난이 낯선 것이라면, 더욱 더 삶이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악행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선행이 가져다 주는 고난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흔히들 탄식하는 말, “주를 믿고 따르는데,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는 멈춰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살고 있으며,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두 구절이나(3:19, 4:6), 우리 주님께서 죽은 영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현재 우리 한국 개신교회는 사도 신조 가운데서 한 구절을 빼놓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음부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조차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옥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600년 이상 고백되어 온 전통적인 사도 신조에서 이 구절을 삭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희 교회에서는 <연옥설>은 부정하지만, 주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이 구절의 의미와 목적을 삭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몇 분의 장로님과의 대화에서, 자살자의 장례를 어떤 근거로 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기독교인 자살자가 계속 증가하는 현실에서 그냥 덮어둘 문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자살 그 자체는 큰 죄악입니다. 그러나 그 자살에 이른 그 사람의 심리상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부인하는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를 들어 치매환자나 정신질환자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정신일 때를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자살심리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자살에 이르는 경우는 소위 정신 줄을 놓아버린 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잠시 잠깐의 잘못된 판단이나 생각이 빚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술이나 마약 등에 취해 버린 경우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적어도 우리 인간의 좁은 소견보다는 훨씬 더 넓고 깊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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