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95(2012. 4. 24. 화요일).

시편 144:5-8.

찬송 2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키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지하 주차장의 외진 곳에 그것도 빈 카트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왔으니, 있을 리가 없을 거다 거의 포기하면서도, 제발 제발하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차했던 자리로 급히 찾아갔습니다. 기둥이 보이고 저 뒤에 과연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마음이 마구 두 방망이 질 칩니다. 그런데 기둥을 돌아서는 순간 저만큼 떨어져 있는 곳에 빈 카트와 그 위에 오롯이 올려져 있는 자주색 가방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 순간의 안도와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흔히 휴일에 등산을 다녀오면, 그 좋은 기분으로 일주일 정도가 즐겁다고 합니다. 좋은 곳으로 일주일 이상 여행을 다녀오면, 그 여운으로 한 달이나 두 달간을 너그러울 수 있다고 하지요. 이렇게 중요한 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땐, 적어도 삼 개월 아니 육개월 정도는 매사에 무조건 고마운 기분으로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가만히 있어도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다 무조건 고맙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앞으로 화가 나거나 원망스럽거나 뭔가가 더 욕심나거나 안달 날 때마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이 여행지의 사진이나 기억들을 수시로 되새기듯, 그 주차장의 빈 카트위에 오롯이 올려져 있던 가방을 떠올릴 겁니다. 그러면 큰 바구니에서 잠든 아이를 잠깐 들여다보는 엄마의 표정을 담은 폴 필의 그림 <엄마 속 엄마>의 표정이 되겠지요. 그림 속 엄마의 발밑에서 옹기종기 먹고 놀고 장난치는 아기 고양이들 같아질 겁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312일 방송>b.

 

2. 최근 막말 파동이 정치가에게서 코미디언으로 그리고 각 부문 지도자들에까지 번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소시효도 없이 근거 자료만 있으면 메가톤급 폭탄처럼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세례자 요한에게까지 들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막말을 일갈하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이나 <현대인의 번역>은 훨씬 더 쉬운 말로 전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앞으로 내릴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피하라고 했느냐?” 그들은 입으로는 쉴 새 없이 회개를 외쳐댔지만, 사실은 회개한 사람다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회개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에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회개라는 말을 하는 것마저도 꺼려할 뿐 아니라, 설사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진정성은 물론 기대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입에만 발린 가식적인 말이어서 감동은 고사하고 식상할 때가 많다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런 사람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 흔해빠진 돌멩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시대를 두고서 한 예언 같기도 합니다. 교권에 눈이 어두운 종교 장사꾼들이 득실거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이들로 비쳐지고 있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까 걱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니 말입니다. 다른 누구 탓이 아니라, 바로 저 같은 목사들의 탓입니다. 말만 있고 삶은 없는,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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