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97호(2012. 4. 26. 목요일).
시편 145:1-3.
찬송 38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치라면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고, 스포츠라면 공정함을 추구해야 옳지만, 지금 내가 하는 건 정치도 아니고 스포츠도 아니니 누가 내 역성 좀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만해라. 다 알아들었을 거다.” 엄마한테 호되게 혼나는 손자를 감싸주시는 할머니처럼, 아무리 미운 동생이라고 해도 친구랑 다투다가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와 편들어 주던 언니처럼, 그냥 덮어놓고 내 역성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성이란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한쪽만 편들어 준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다분히 편파적이고 제 삼자의 눈에는 꼴사납게 보일 수도 있지만요, 세상 모든 일의 공정함이란 잣대만 들이댄다고 꼭 맞는 일일까요? 뭉크가 1894년에 그린 <그 다음 날> 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앞섶이 헤쳐진 분방한 모습으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데, 테이블에 술잔과 술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술에 잔뜩 취한 게 분명합니다.
1909년 오슬로 국립 미술관이 이렇게 단정치 못한 작품을 매입했을 때, 여론은 무척이나 시끄러워졌지요. 한 유력 일간지는 대놓고 비꼬았습니다. “이 그림은 수년 동안 팔리지 못한 채 이 전시장 저 전시장을 기웃거렸다. 홀대받아 마땅한 그림 아닌가? 취기에 젖은 이 못된 여인을 불쌍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혹 갈 곳이 없다고 해도 국립 미술관은 그녀가 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당시 가뜩이나 뭉크가 싫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에 지지를 보냈지요. 술 취한 그녀의 역성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녀, 어떻게 됐을까요? 며칠 후 국립 미술관장 옌스티스가 차분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녀가 깨어나면 물어보겠다. 이곳이 쉴만한 곳이냐고. 그러나 지금은 자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녀가 있는 곳이 미술관의 영예가 될지 치욕이 될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른 시간이다.” 참 재치 있고, 품위 있는 역성들어 주기였지요. 오늘날 뭉크의 작품이 명작이 된 데에는 옌스티스의 공로가 컸습니다. 그는 오슬로 국립 미술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당시 냉대를 받던 뭉크의 작품들 <절교>를 포함해 모두 12점을 구입했고요. 세월이 흘러서 그들은 오슬로 미술관의 영예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요. 이왕에 역성들어줄 바에야, 이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의 역성을 들어줌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이런 소신과 여유는 그가 믿을만해서 라기 보다는, 그를 믿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닐까요? “참 친한 줄 알았더니 너무 좋아하는 사인인줄 알았더니 정작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는 역성들어 주지 않는 무심한 사람.” 나에게 무심한 사람은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3월 8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다는 내용입니다. 40일 금식을 경험한 고향 후배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그냥 40일 금식기도를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걸만한 그런 문제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 분은 40일 금식 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서 40일 금식 후 죽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40일 금식이라는 말은, 죽음을 각오하는 분명한 목적을 건 행동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40일 금식하신 사건 역시 그럴만한 목적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목적이란 게 무엇일까? 오늘 묵상할 주제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그리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당신이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음을 드러내시려할 때, 마귀의 도전장을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이런 마귀의 도전을 통해서 당신의 메시야직의 정통성과 능력 그리고 순결성을 증거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역사의 중심인물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 역사의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인류 구원을 위해서 마귀의 도전을 피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또 다른 측면을 말씀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앞에 항상 버티고 서 있는 마귀의 도전을 각오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마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목숨을 건 싸움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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