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74(2012. 10. 20. 토요일).

시편 40:9-10.

찬송 26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비극적인 사랑, 비극적인 삶, 비극적인 최후. 이런 말 뒤에는 굴곡지고 한 많은 평생을 살다간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이 떠오릅니다. 비극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했던 것에 따르면, 연민과 공포를 통해서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이기 때문이지요. 즉 슬프고 아프기만 할 뿐, 인간의 정신을 정화시키거나 고양시켜주지 않는다면 비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정의했지요. 한 인간에게 두 가지 절대 명령이 주어졌을 때, 더 중요한 하나를 택하고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비극이다. 그러면서 비극의 원형으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꼽았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엄청난 비극을 알고 참회하는 뜻으로, 스스로의 눈을 찌른 후 테베스를 떠났을 때, 안티고네가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스와의 사이에 난 딸이었지요. 안티고네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다시 테베 시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동안 안티고네의 쌍둥이 오빠들은 서로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전쟁을 벌이다가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외삼촌인 크레온이 권좌를 차지하고선 쌍둥이 중의 형인 에테우클레스에게는 나라의 영웅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고, 동생인 폴리네이키스의 시신은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했습니다. 누구든 시신을 거두어서 장례를 치루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지요. 생전에 자신에게 맞서 싸웠던 죗값을 물은 것입니다. 오빠의 시신이 들판에 내버려진 것을 본 동생 안티고네에게, 두 가지의 절대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실정법을 따를 것이냐? 양심을 따를 것이냐? 안티고네는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양심을 따라서 오빠의 시신을 거두었고, 그 죄로 지하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맞았지요. 독자와 관객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슬픔을 넘어선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 어떤 권력도 짓밟을 수 없었던 안티고네의 숭고한 정신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지 깨닫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남북 대치 상황을 두고 흔히 분단의 비극이란 말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비극이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 할 상황이, 60년이 넘도록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우리들의 정신은 이 비극을 통해서 얼마나 정화되고 고양됐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625일 방송>

 

2.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고 합니다.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혼자서 살아갈 수 있으려니 해도, 정치적인 영향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도, 그리고 그들의 과격한 행동을 주목하던 천부장도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의 신앙 체험을 듣던 유대인들이,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유대교를 떠나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말할 때(18, 21), 더 이상 들을 수 없겠다는 듯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리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소리를 지르며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연호(連呼)합니다. 정치적 행동에 돌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천부장 역시 그런 분위기에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대처하고 맙니다. 채찍질과 신문으로 응대하는(24) 대부분의 통치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의 로마 시민권 주장에 대해서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천부장을 만나게 됩니다(25-29).

   사도는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외형적으로는 로마인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이런 이중국적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이중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 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사도는 오히려 복음을 위해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한 때 어느 유명 사립대 총장이 이중국적 시비에 말려서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지만, 워낙 학교에 경제적인 공헌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학생들이 지지해서 눌러 남을 수 있었습니다. 선하고 착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모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덕스러운 정치를 바라는 세태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정치적 자세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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