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75호.
시편 40:11-13.
찬송 23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너무 바빠서요.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찬찬히 살피고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삶의 속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요? 판화가 이철수의 [소리 하나] 라는 산문집이 있는데요. 이 말이 참 좋았습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는 그 걸음으로.” 그는 또 이렇게 말했지요. “볼 것을 보고, 만날 것을 만나고, 누릴 것을 누리면 안 되나요?”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걸으면서 살피면, 살아 있는 것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는 그 걸음으로 삶은 읽어가는 길입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 속도로, 볼 것을 보고 만날 것을 만나고, 누릴 것을 누릴 수 있는 계획, 가슴속에 그려보면서 출발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8월 17일 방송>
2. 우리가 사는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사는 시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시대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그토록 분노에 찬 설교를 했던 것도, 자기 시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악한 시대의 특징을 분명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실종을 악한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6절).
알맹이가 빠진 현상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쓴 신동엽 시인이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책을 쓴 마이클 호튼 같은 이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떤 일에서든 껍데기는 있기 마련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보았던 유대교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뽑으신 선민이라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씀 같아서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이 중심에 있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면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강조하지 않는 설교로 일관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실종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7, 10-13절).
우리 시대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매우 비관적이고 자포자기까지 합니다. 민주주의 시대의 가장 큰 힘은 상식이 인정되고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전유죄 유전 무죄>라는 용어는 이제 정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거짓과 불의가 문제가 아니라,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거부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착취를 당하는 세상이 되어가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멍가게를 집어 삼킨 대기업의 체인점은 빵집도 평정하고 재래시장도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공권력은 강 건너 불구경할 뿐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학대하는 사회, 뇌물이 상식이 된 사회, 억울한 사람을 양산(量産)해내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코 오래도록 눈감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14-15절).
사는 길과 죽는 길은 분명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선포합니다.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입니까? 대단한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 마땅히 생각할 그것을 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에 불과합니다(롬 12:3). 지도자는 책임감을 갖고 맡은 일에 충실하고, 빵을 굽는 이는 먹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빵을 굽는 일입니다. 장사하는 이들은 저울추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이는 진심으로 가르치면 충분합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들 배후에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사 장로라고 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직함은 한낱 장신구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절히 부르고 계시는 음성이 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별된 몸짓이 절실한 때입니다.
3. 묵상식구 강영구목사님이 한 주간 베트남 수련회에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유익한 시간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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