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225호(2012. 12. 10. 월요일).
시편 55:4-7.
찬송 16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어떤 음악을 들었을까요? 프랑스 작가 미셸 트루니에는 [사랑의 야찬]이라는 책에서, 해와 달 별들의 음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천체들의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풀어놓았지요. “음악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라. 그러면 음들을 알게 되어 천체들의 음악과 대등한 너희 자신의 음악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결국 뱀의 유혹에 극복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음악 나무의 열매 하나를 깨물기가 무섭게 그들의 귀가 막혀버렸다. 천체들의 음악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음산한 정적만이 그들을 짓눌렀다. 지상 낙원은 그렇게 끝이 나고 음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뒤로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오르페우스가 있었고, 몬테베르디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 있었다. 또 라벨과 드뷔시 벤자민 브리튼, 피에르블레즈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하늘은 줄곧 침묵을 지켰고, 천체들의 음악은 두 번 다시 인간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음악의 역사가 시작되고 이어지는 가운데, 별의 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도 계속 됐습니다. 우주 망원경을 이용해서 별들을 관측한 결과, 별들이 진동하면서 고유의 소리가 발생하고, 별의 나이나 크기 구성 원소에 따라서, 소리도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지요. 또 몇 년 전 파리 천문관측소에서 별들의 소리는 녹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는데요. 별들의 소리는 과연 어떨까요? 옛날에 박태준 시인은 별이 윙윙댄다고 했고, 박재삼 시인은 도란도란 거린다고 했고, 또 박목월 시인은 별이 움직이는 소리를 스치는 옷자락 소리에 비유했는데요. 파리 천문 관측소에서 녹음한 별의 소리를 들은 네티즌들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SF에 등장하는 음악 같다. 에일리언이 만든 음악 같다. 귀로 듣는 별의 소리와 마음으로 듣는 별의 소리가 이처럼 다르다는 걸까요? 아니면 문학과 과학의 간극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9월 17일 방송>
2. 엊그제 한 봉사단체의 운영이사회 조찬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후원 회비를 내는 정도인데, 워낙 참석률이 낮다보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기도회를 가졌는데 준비된 대림절 찬송을 성탄절 찬송으로 바꾸겠다며, 즉석에서 성탄절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이제 막 대림절 첫째 주일을 보냈는데 말입니다. 대림절을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주님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이면서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기다림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탄절에 가서 성탄절을 기뻐하면 좋겠는데, 대림절 기간까지 성탄절로 바꾸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탄절의 상징인 성탄 트리는 24일 밤에 점등되는 뉴스장면은 많이 봐 왔을 텐데 말입니다. 기다림, 이 보다 더 좋은 신앙의 주제는 없습니다. 장사꾼들의 농간에 교회가 놀아나는 형국이라 생각할까요?
오늘 본문은 종말에 관한 사도의 견해가 잘 들어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도대체 종말이 언제 올 것이냐고 답답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는 임박한 종말이해(7:8-40)가 확연합니다. 심지어 처녀들까지 그냥 처녀로 지내라고 충고까지 합니다. 그 까닭을 “임박한 환란을 인하여”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전서는 그 보다 먼저 쓴 서신이라고 할 때, 사도의 종말관은 임박한 종말관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와 시기라는 것을 인간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미래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그 때와 시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이 사도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전도관이나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자신들만의 공동생활을 강조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일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처럼 들뜬 사람들에게 오히려 낮에 속한 사람답게 근신과 믿음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는 루터의 말을 상기하게 됩니다. 혹자는 스피노자의 말로 인용하지만, 스피노자가 루터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인 점을 계산한다면 누가 누구를 인용했는지는 판단해 볼 일입니다.
3. 오늘 교회 짐을 보관하는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주까지 이사는 일단락 하려고 합니다. 나그네 삶에는 이처럼 길고 힘든 이동이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걸 멈추게 되는 날이 본향에 이르는 날일 테니까요.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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