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45호 (2013. 7. 18. 목요일).
시편 시 106:8-12.
찬송 36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고사 성어에 등장하는 건 숲이 아니라, 산이지요. 옛날 중국 하향에 퇴향산과 왕옥산 두 개의 큰 산이 있었는데, 산이 크고 높다보니 어딘가를 갈 때마다, 두 산을 빙 둘러 가야 했습니다. 그러자 아흔 살이 다 된 우공이라는 한 어리석은 노인이 가족들에게 제안을 하지요. 우리가 힘을 합쳐서 저 두 산을 옮기자. 처음에 어이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던 가족들도 우공의 말에 따릅니다. 그러자 다 같이 산의 흙을 퍼서 발에 갔다 버립니다. 그 정성에 감탄한 신이 결국 두 산을 옮겨주었다는 이야기가 우공이산(愚公移山)입니다. 우공이산도 그렇고, 장 주오노의 엘지아르 부피에도 그렇고 그들이 조금만 똑똑하고 현명 했더라면, 그 일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리란 판단을 했겠지요. 그래서 아예 할 생각을 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좀 모자라고 바보스럽고 어리석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못했고, 그래서 오히려 황무지를 숲으로 만들고, 산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도, 오히려 자신이 지나치게 똑똑하고 뛰어나서가 아닐지, 어떤 판단이든 너무나 분명하게 잘 하기 때문이 아닐지. 이제 부터는 어딘지 좀 어리석고 모자라서, 뭐가 불가능하고 가능한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그런 바보가 돼볼까 싶습니다. 그 어리석음과 바보스러움이야말로, 절대 해낼 수 없으리라고 여겨지는 일을, 기어이 이루어 내 주리라. 내친 김에 혼자 바보스런 웃음을 지어보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313년 4월 17일 방송>b.
2. 부활의 현장을 경험한 제자들의 의심 가득한 모습들과(36-43절),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들(44-49절), 그리고 승천기사(50-53절)를 차례로 읽었습니다. 저는 부활신앙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준 첫 번째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일화들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여러 차례 목격되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로 나갈 때, 상여를 멈추게 하고 살려내신 일(눅 7:11-17),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믿음으로 살려주신 일(눅 8:40-56),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살려내신 일(눅 11:17-44)은 신화(神話)처럼 들을 수 있었던 얘기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제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거나 아니면 수많은 증인들을 통해서 확인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으셨던 주님이 그들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못 박힌 손과 발을 만져 보았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도 손을 넣어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심과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부활은 적어도 이성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에게서도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을지 모릅니다. 부활은 우리들에게 전혀 낯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출발점이 되는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삶에 이르게 하는 첫 걸음이라고 말입니다. 부활은 그 현장에 있는 사람이건오늘 우리든,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의심할 수 있고 흔들릴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신앙을 굳게 붙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이 인간을 붙잡는 힘이라고 하면, 신앙은 하나님을 붙잡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성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신앙 안에서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인 때문입니다.
3. 이번 서산 설교 세미나에는 15명이 참가하였고, 묵상식구 황호순교수님이 수고하시는 명음교회는 교재비, 부교재비, 강사 차량 유류비를, 저는 재능기부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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