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501(2013. 9. 12. 목요일).

시편 시 119:9-11.

찬송 1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엄마는 심부름을 보내면서 끝에 꼭 이 말을 덧 붙이셨습니다. “한눈팔지 말곤 곧장 집으로 와.” 그 때는 대수롭지 않겐 들었는데, 한눈팔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길에는 한 눈을 팔았습니다. 심부를 가는 길에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는 친구가 쓸쓸해 보여서, 같이 그네를 탄 적도 있고요. 오는 길에 만화방이나 오락실에 들려 허락도 없이 거스름돈을 써버리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저녁밥을 짓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만두까지 야무지게 사 먹고, 정작 심부름한 물건은 어딘가에 놔두고,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엄마는 진심으로 화를 내며 야단치셨지요. “도대체 어디다 한 눈을 팔고 다니니?” 글쎄요. 어디에다 팔았을까요?

   당연히 볼 데는 보지 않고 딴 데를 보는 눈, 한 눈. 그래서 쓸데없이 한 눈 팔지 말라고 하지만, 무엇을 좋아한다고 무엇이 보인다 사이에는 상관관계라는 게 있어서, 좋아하면 다른 것은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한 눈 파는 지를 관찰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철이 없어서, 꼭 해야 할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한 눈 파는 일은 많이 줄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한 눈 팔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이 해야 할 일들로 꽉 차, 오히려 그 일을 제대로 해내기 힘들어집니다. 그런 때일수록 지금 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래서 어쩌면 쓸데없는 것일 수도 있는 데다, 한 눈을 팔고 돌아오면, 새로운 힘도 생기고 능률이 오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끔은 한 눈 팔아도 좋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한 눈 팔 수 있는 여유와 호기심,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823일 방송>

 

2. 가끔은 외롭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그런 심정을 드러내고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사도는 디모데를 두고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한 말에서 짐작한 것입니다. 표리가 부동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한 사람을 두고도 필요에 따라서 좋았다 나빴다 합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얼마나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말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면서, 최고조의 감정의 표현이랄 수 있는 관제(구약에서는 전제로 번역됨)를 언급하기까지 하는데,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에서 나온 헌신위에 사도 자신의 생명까지 기꺼이 다 쏟아 붓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죽어도 좋겠다는 그런 심정 같습니.

   우리는 왜 신앙하는 것일까?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일들이 제자리에서 바라봐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나,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신앙하는 근본목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런 것들을 다 이룬 이들도 신앙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자들이 신앙하는 이유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절박한 목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우뚝 서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 큰 때문인지, 이런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한 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리에 서서 살고 있는가를 걱정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문제풀이에 온 몸과 마음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핀잔밖에 들을 것이 없는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가 사도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파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 소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병이 들어 사도의 간병을 받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돌려보내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비록 그가 현실적인 책임은 다하지 못했을지라도, 결코 비난받을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변호하는 때문입니다. 다시금 질문해 봅시다. 왜 신앙하는 것인가?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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