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565호(2013. 11. 15. 금요일).
시편 시 135:19-21.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성공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성공 없이 그냥 나아갔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런데 좀처럼 좋은 날은 오지 않습니다. 세월은 자꾸 흘러가는데 좋은 날만 기다리다가, 인생이 지나가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바심이 났습니다. 조나슨 윈터슨은 미국인들에게 오랫동안 웃음을 안겨준 희극배우였습니다. 지난 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87세라는 나이는 굴곡진 20세기를 맨몸으로 부대끼고 관통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지만 가진 게 없고, 똑똑해 지고 싶지만 배운 게 없고, 유명해 지고 싶지만 재능이 부족하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볼 텐데 그런 인맥도 없고, 사랑받고 싶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이 나의 간절한 바람은 귀뚱으로도 듣지 않고, 저 멀리 앞장서서 나를 조롱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언제까지나 돌아서서 눈물지으며 나에게도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야 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럴 때 조나슨 윈터스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공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성공 없이 그냥 나아갔다.”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성공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삶 자체가 목적이 됐습니다. 때로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지금 나의 발목을 붙잡는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 하나 때문에, 많은 것들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그냥 나아갔다고, 그냥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나슨 윈터슨의 말에 니체가 쓴 이 아름다운 글로 이어 봐도 좋겠지요. “나의 행복 구하는 데 지쳐, 발견하는 버릇을 나는 익혔다. 바람이 내 앞을 막고 있기에, 나는 어떤 바람이건 순풍으로 할 량으로, 나는 돛을 친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11월 7일 방송>
2. 본문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제목을 붙인 주석서도 있는데, 우리가 생각해 오던 평화롭게 구름을 타고 천사들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오실 그리스도와는 대조적입니다. 엄청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악마와의 전쟁을 장악하고 지휘하는 한 탁월한 장군을 연상하게 하니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계시록을 환상의 책이라고 부르는 까닭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야 하는 때문에, 이런 극적인 장면이 소개될 수 밖이라고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거짓과 불의한 세상을 통쾌하게 쓰러트리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장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악행을 일삼았던 사람들이 처참하게 멸망하는 모습을 희망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그들과 얼마나 다르게 살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어느 한 사람도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달랐을지 몰라도, 중심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은 거짓과 불의 그리고 죄 된 욕망으로 가득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 분의 은혜를 은혜로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마저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께서 악마를 물리치시는 그 장엄한 장면을 보여 주심도 은혜일 뿐, 뻐기거나 거들먹거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으로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높일 뿐입니다. 뭔가를 조금 성취했다고, 조금 넉넉하게 살고 있다고, 그걸 자신에 의한 의의 열매인양 교만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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