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603(2019. 6. 15. 토요일).

시편 18:13-16.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권력자들의 횡포, 잘난 놈들의 오만함, 사랑한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쓰린 고통과 느려터진 사법제도, 무례한 관리들과 참으면 오히려 손해 보는 세상, 죽으면 이 모든 고통이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는데, 그 누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한 인생을 투덜대며 진땀을 흘리려고 하겠는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 나오는 유명한 독백이지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뒤로 이어지는 햄릿의 속마음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난 해가 1616403년 전입니다. 햄릿의 독백을 보면 400년 전에도 인생의 짐은 무거웠습니다. 짐의 무게뿐만 아니라 종류도 엇비슷해 보여서 위로가 되는데요. 어제 오늘 참아낸 아픔들이 400년 전에도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던 아픔들이었다. 위로(慰勞)는 동질감을 느낄 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9529일 방송>

 

2. “불을 지르러 왔다(49-53)”, “이 시대의 뜻을 알아보라(54-56)” 그리고 원만한 해결(57-5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모두 각각 독립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서에서 그 평행 귀를 찾을 수 있는데 마태복음서 기자는 각각 따로따로 편집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10:34-46, 16:2-3, 5:25-26). 그러니까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편집 의도에 따라서 필요한 자리에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을 지르러 왔다.”는 주제로 상당히 과격한 내용의 말씀을 하십니다. 웬만하면 가족을 화해시키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하셨을 텐데,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질러 분열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섯 가족이 있는데, 세 사람과 두 사람이 서로 반대하고, 부자지간이 서로 반대하고, 모녀지간도 반대하고, 고부가 서로 반대하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분열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신앙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문제와는 달리 신앙문제 앞에서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그동안 제가 지켜본 결과입니다. 1960년대 서울의 한 교회에서 남편이 없는 틈에 두 모녀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사실은 자살이 아니라 신앙 검증을 하겠다고 남편을 상대로 벌인 시위였는데, 그만 귀중한 목숨까지 잃은 것입니다. 그 죽은 모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지도자들에 홀려서 막 16:18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고 독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지난 촛불 정국 시절에는 많은 가정들이 정치적인 성향의 차이로 한동안 말조차 하지 않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집에서도 우리 내외와 자녀 3이 있는데 1:4로 갈려서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경상도 출생인 아내는 박근혜 동정론에서 한발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며 불평을 했지만, 잘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만일 신앙 문제였다고 한다면, 훨씬 더 심각했을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몇 가정은 신앙 문제로 가정이 파탄이 났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간 한 장남은 끝내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도 상주노릇을 하지 않았다 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씀에 따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은 가정을 분열 내지 해체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고 계실까 하고 말입니다. 주님의 전체적인 말씀에 비출 때,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 작전상 후퇴한 것이라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상처로 곪은 가족 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수술이라는 진통을 겪어야 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본문에서의 갈등과 분열은,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수술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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