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11호(2020. 4. 18 토요일).
시편 77:7-9.
찬송 3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 하나 이어갑니다. 우리 뇌는 가만히 놔두면, 부정적인 기억을 먼저 떠올리고,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에게 잘해 준 사람보다 상처 준 사람을 잊지 못하고, 성취의 기쁨보다 실패의 쓰라림을 떠올리고, 해서 좋았던 기억보다 나빴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이왕이면 잘했던 기억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 기억이 더 오래가는 걸까요? 우리에게 그만큼 좋은 일보다 나빴던 일이 많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래서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끼는 걸까요? 캐나다 심리학자 키스 워틀리가 그와 관련된 실험을 했습니다. 특별한 감정이 있을 때마다 일기를 쓰게 했더니, 부정적이 감정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났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 사람에게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많았나 보다 싶은데, 이번에는 실험 방식을 바꿔봤습니다. 무선 호출기를 통해, 해당시점의 감정을 알려달라고 한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했더니 행복한 순간이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두 배는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실제로 더 많이 벌어진다는 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인식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점을 시사 하는데요. 부정적인 기억이 나쁘기만 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기억이 없다면, 만일의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안 좋은 상황에 대처하거나 대비하는 능력이 떨어지니까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부정적인 기억을 잊으려는 노력 보단, 기억날 때마다 가슴 답답하고 뇌가 쪼그라든 것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분리해 내는 일입니다. 감정을 빼내고 사실로만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보다 감정적인 존재에 가까워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괜한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키워놓은 감정에 빠져서 좋을 건 없습니다. 사실과 감정을 분리하기, 우리 삶을 한결 가뿐하게 그리고 합리적 판단을 하게 해 줄 비결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7년 4월 25일 방송>
2. “믿음의 생활(4:16-5:10)을 읽었습니다. 시골생활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수 백 세대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살아보았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여러 면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두 차례 통장님의 방문을 제외하면, 아파트 생활은 완전 외톨이 생활입니다. 그러나 시골은 서른 세대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공유되기에 머리가 아프고 심기가 복잡해질 때가 많습니다. 하루도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매우 시끄럽고 분주합니다. 가령 이번 달 쓰레기 당번을 맡으신 분이 난감해 하면서, 마을 공동 카톡에 불편한 심기를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빈터에 심은 소나무들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그걸 정리하느라 생긴 나무 가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치우는 작업에 마을 주민들을 소집해서 소각하는데, 불도저를 불러서 땅을 파고 묻는다며 한바탕 야단을 떨기도 했고, 깔끔을 떠는 여자 총무님의 제안으로 헝클어진 전선들을 정리한다며 업자를 불러 정리하는데 최소 50만원은 들겠다며 의견을 묻는 공지문도 올라왔습니다. 마을 기금이 2천만원쯤 모였는데, 그걸 빨리 쓰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 같다고 열을 내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듯 삶은 시끄럽고 어수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믿음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삶에는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이 있는데, 외적 면을 위해서는 물론이지만, 내적인 면을 위해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외적인 면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치열한 것에 비해서, 내적인 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우리지 않는 실정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땅의 집과 하늘의 집이 대비되고 있는데, 땅의 집에 관해서는 민감할 뿐 아니라 적극적인데 반해서, 하늘의 집에 대해서는 둔감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팔 다리가 쑤셔오고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하게 될 때, 갑자기 인생의 황혼이 밀어닥친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 주변의 친구들은 비교적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자부들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황혼을 느낄 때, 갑자기 그동안의 삶이 허망하고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황당함 말입니다. 내적인 삶, 정신적인 삶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인 삶에 대해서 희미하게 눈이 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어느 한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순간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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