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77(2020. 6. 23. 화요일).

시편 89:3-4.

찬송 5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운동경기를 비롯한 그 외의 여러 자리에서 페어플레이를 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 그건 자신과 비교되는 상대방에게 질투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질투가 사랑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사랑도 질투도 다스리기 힘들어지지요. 내가 찾은 노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중에, 오늘은 열네 번째 곡 사냥꾼”, 열다섯 번째 곡, “질투와 자존심보내드립니다. “여기 물방앗간 시냇가에서 사냥꾼이 대체 무엇을 찾는가? 자네 사냥구역에나 머물게나. 거만한 사냥꾼이여, 여기에 자네를 위한 사냥감은 없네. 여기에는 단지 나를 위한 온순한 새끼 사슴 한 마리가 살고 있을 뿐. 자네가 그 순한 사슴을 보고 싶다면, 엽총은 숲에다 세워두고, 지저대는 개들도 집에 두고, 시끌벅적한 야단스런 뿔나팔 소리도 멈추고, 덥수룩한 턱수염도 깎아버리게나. 그렇지 않으면 정원의 새끼 사슴이 정말 겁을 먹는다네. 하지만 더 좋은 건, 자네가 숲에 머물면서 물방앗간과 물방앗간 사람들을 조용히 내버려 두는 것이네. 작은 물고기들이 초록색 나뭇가지에 무슨 쓸모가 있겠나? 다람쥐가 푸르스름한 연못에서 대체 무엇을 바라겠나? 그러니 거만한 사냥꾼이여, 숲 속에 있거나. 그리고 나를 세 개의 물레바퀴와 더불어 내버려 두게. 내 연인에게 잘 보이고 싶다면, 친구여,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지 알게나. 밤에 숲에서 나온 멧돼지들이 그녀의 양배추 밭에 함부로 들어가 밭을 이리저리 짓밟고 파 뒤집어 놓는다네. 그 멧돼지들을 쏘게나. 그대 용감한 사냥꾼이여.“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4623일 방송>

 

2. “바울과 다른 사도들(1-10)”을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야기는 갈 1:10-24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행전 9:3-18, 22:6-16, 23:12-18에도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행전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 1:10-241차 자료로, 행전의 3 본문을 2차 자료로 부릅니다. 사도 자신에 의한 증언인 오늘의 본문에 더 비중을 둬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늘 묵상에서는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나 그 까닭을 얘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합니다. 다음 기회가 있을 것으로 알고, 오늘은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란 표제어를 따라 묵상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선교사로 활동한지 적어도 14년이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는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인식의 차이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갈등과 오해가 필연일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타인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불거집니다. 대화가 부족해서려니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배우자 사이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금성 화성 얘기가 나왔을까요? 얘기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은 사이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율법적 관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또한 그들의 배경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살게 된 때문에 이방인의 입장과 처지에서 기독교회를 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율법에 아무리 충실하려고 해도 율법으로 도리어 죄인이 되고, 율법의 무능과 무력함을 느끼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몽학선생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대상이 유대인인 이상 율법적 기독교 신앙을 확립하려고 힘쓴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할례가 필요 없게 되었지만, 유대적 기독교인에게는 할례가 매우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타협을 보았는데, 바울과 바라바는 이방인의 사도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의 사도로 역할 분담을 한 것입니다.

 

3. 오늘 저는 자가격리 중인 아이들의 고충해결사로 아산엘 갑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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