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00호(2020. 7. 16. 목요일).
시편 92:1-4.
찬송 47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거리에서 네일 아트 샵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그래도 내 생애 제일 예쁜 네일아트는 봉숭아 꽃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요즘은 편리하게 기분전환삼아 이용할 수 있도록, 봉숭아물들이기 재료가 마트에도 나와 있는데요. 작은 통에 들어있는 가루에 물을 조금 붓고 반죽해서 손톱에 발라주고 2, 30분 기다렸다가 찬물로 씻어주면 마트 표 봉숭아물이 드려집니다. 편리한 세상이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옛 시절의 그리움도 밀려오는데요. 장독대 곁에 핀 봉숭아 꽃잎 따 커다란 돌 위에 놓고, 백반을 넣고 잘 빻은 뒤 손톱위에 얹고는 비닐과 실로 칭칭 감습니다. 예전에는 라면이나 과자봉지를 잘라서 감싸기도 했지요. 와락와락 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걸 하루 동안 꼭 참으면, 무명실에도 꽃물이 들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험한 잠버릇에 쑥쑥 빠져나 한 두 개만 물들거나 손톱이 아니라 그 주위 피부에만 물이 들기도 했는데요. 살갗에든 꽃물 가엽기도 하고 한참이 지나야 빠졌지요. 중국의 오래된 꽃 백과사전 [군방부]를 보면 줄기와 가지 사이에 꽃이 피어 머리와 날개 꼬리와 발이 모두 우뚝하게 일어선 것이 봉황새의 형상을 닮아서 봉선화란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봉선화는 그저 울밑에서 겸손하게 피어 수줍게 웃고 있는 서민의 꽃 봉숭아지요. 잎도 꽃도 순순히 내주어서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봉숭아 꽃. 안도현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봉숭아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 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 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야 해/ 사랑은 가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말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둥우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8월 3일 방송>
2.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1-11절)”을 읽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 3장은 인류의 타락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불화 곧 부조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부조화는 결국 인간 자신과의 부조화를 만들었고, 마침내는 이웃과 세상과의 부조화로 발전해 나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일반 종교는 인간 자신의 힘과 지혜로 조화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우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인간의 힘과 노력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조화의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사도는 이런 화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인 인간을 대신해서 죄의 짐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혹자는 반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갚아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을 인정하고 받아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섭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가 가장 난해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른바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들 인간과 하나님의 분명한 위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해서, 좀 더 분명히 말씀드리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가지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천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십자가 신앙이나 부활 신앙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신앙을 능가할 어떤 신앙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앙은 무에서 유를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실증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구원의 길, 화해의 길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으로 일단락 된 것입니다. 다만 이 사실을 인간이 믿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위대하고 위대한 인간의 과제이며 동시에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누구도 불가능한 축복인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천의 삶 : 자신의 세례를 기억하며 사는 생활. / 롬 6:1-14. (0) | 2020.07.18 |
---|---|
불순종과 순종의 결말. / 롬 5:12-21. (0) | 2020.07.17 |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 / 롬 4:13-25. (0) | 2020.07.15 |
아브라함이 믿음의 모델이 된 실례(實例). / 롬 4:1-12. (0) | 2020.07.14 |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이 마련하신 방법을 믿는 길. / 롬 3:21-31. (0) | 2020.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