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03호(2020. 10. 27 화요일).
시편 시 109:11-15.
찬송 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기특한 불효자 봐라> 아들, 예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정식으로 깍듯하게 사과해 주서 정말 고마워. 사과를 받아내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어서 기쁘다는 말이 절대 아니야. 뭐랄까? 사과라는 형식의 소통을 위한 창문을 먼저 활짝 열어줘서, 이렇게 엄마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할 수 있겠구나 싶거든.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누구를 만만하게 본다는 거, 그래서 자기감정을 거르지 않고 표현한다거나 조심성 없게 행동한다는 것이 100퍼센트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사실 참으로 복잡하고 잘 흔들리고 실수투성이인 존재잖아. 그 예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어. 딱 엄마를 보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복잡하고 쉽게 흔들리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에게, 무슨 말을 해도 또 어떻게 행동을 해도 모두 용서 받을 수 잇을 것 같은 대상이, 세상에 한두 명 쯤 있어 주는 건 얼마나 다행이니. 그래서 우리 아들이 엄마에게 가끔 아니다, 가끔 사춘기에 들어서는 가끔 보다는 조금 더 자주, 이 만만한 엄마에게 들이대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비록 그럴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야. 그런데 컴퓨터 고장 났다는 말 들었을 때, 사실 엄마 많이 찔렸었어. 잘 알지도 못하는 거 아예 손을 대지 말아야 갰다 싶더라. 그런데 꼭 엄마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니, 한시름 놓았어. 최근 노년을 준비하면서 엄마가 읽고 있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더라. “호기심의 상실이야말로 노년의 특징이다.” 참 슬픈 말이지 않니? 알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마음을 잃어 가면, 그 때부터 이 엄마도 할머니가 되는 거야. 그런데 엄마는 우리 아들 때문이라도 아직은 더 젊은 엄마이고 싶거든. 이젠 컴퓨터 사용 법을 가르쳐 주기까지 하겠다니 고마워. 아직 한참은 더 젊은 엄마이어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0월 29일 방송>b.
2.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다(31-37절)”과 “무덤에 묻히신 예수(38-41절)”을 읽었습니다. 첫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거론되는 소위 가사설(假死說-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기절 등을 주장하는 학설)에 대항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6시간을(제3시에서 제9시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을 뿐 아니라, 옆구리에 창을 맞았으니 기절이나 거짓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가당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참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기독론을 이해하기 힘든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완전히 죽으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 완전히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완전히 수행하셨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차제에 우리는 우리들 신앙생활에서 왜 자주 흔들리는가에 대해서 진지한 묵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령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뿐 아니라,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부정하는 도전들에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한 성령 잉태설을 비롯해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과 5병2어로 5천명을 먹인 기적 사건 등은 말도 안 되는 허위조작이라는 주장들이 그런 도전들입니다. 신앙의 문제들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불거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사람도 한 순간에 신앙을 포기해 버리는 일이 왕왕 일어나곤 합니다. 철없는 시절에 맹신해 왔다는 변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과 신앙이 다른 차원의 주제들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성(理性)은 인간의 사고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풀어내거나 해석할 수 없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땅의 생각인 인간의 이성과 하늘의 생각인 하나님의 섭리를 대조한 일이 있습니다. “하늘이 언제나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보다 높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팡세>에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저 유명한 파스칼의 노름(Pascal's Gambling)을 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 값”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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