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05호(2020. 10. 29 목요일).
시편 시 109:21-25.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겐 참 멋진 당신께> 신혼 때였지요? 아마?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어떤 일로 크게 싸운 뒤, 3박 4일 말도 안하고 지내던 때. 당신이 출근하면서 식탁위에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나간 게. 그 편지 한 장에 감동을 받아 눈물 콧물 다 흘렸던 날. 그 때만해도 여릿여릿한 새댁이었는데.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서, 당신한테 두 번쯤 연서를 받았네요. 편지에 눈물 한 방울을 후드득 떨어뜨리던 그 여린 새댁. 이제는 울지 않고 눈이 가물가물해지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편지를 읽었어요. 다 읽고 나서 제가 맨 처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이렇게 편지를 잘 쓰면서, 게다가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평균 10년에 편지 한통이라니. 당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런 원망이 솟구치겠지요? 한 달에 한번은 바라지도 않아요. 1년에 한번쯤, 더 힘들면 격년제로 2년에 한 번쯤 만이라도, 이런 편지를 써 줄 수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 막 억울해 지는 거 있지요? 물론 그러다가 얼른 브레이크를 잡았네요. 당신이 안 하면 나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당신 성격에 내 편지 받으면 답장은 꼬박꼬박 해 주었을 텐데. 내가 못하고 안한 일을 당신에게 바라랴 싶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지금껏 우리 속엣 말까지 시시콜콜 모두 주고받던 신혼시절로부터 참 멀리 떠나와 있군요. 그리고 지난 주말 아침, 난 첫 사랑 영어 선생님도, 또 짝 사랑하던 오빠 친구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아파트 화단 응달쪽에 다른 나무들 보다 더 추레하고 키도 덜 자란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어느 덧 그 나무조차 아주 곱게 단풍이 들어 있기에, “그래 너 참 기특하구나.” 이 생각하면서, 넋 놓고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당신이, 아침은 자기가 준비하겠다고 커피도 내리고 빵도 굽고 과일도 준비하기에, 속으로 깜짝 놀랐었지요. 그런데 내 쓸쓸한 뒷모습에 놀라서 옅군요. 역시 난 앞모습보다 뒤태로 승부를 걸어야 한단 말인가? 싶어서 좀 씁쓸하군요. 어쨌든 주말의 와인 데이트 신청, 잘 접수할게요. 무척 기대되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0월 30일 방송>b.
2.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11-18절)”을 읽었습니다. 100세가 되신 노 신학자 이장식 박사께서 어느 일간지와 인터뷰를 하셨는데, 우리 시대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를 사경회가 아닌 부흥회와 신학의 부재에서 왔다고 진단하셨습니다. 역사 신학자로써 정확한 진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경회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한국 개신교회가 열정을 쏟았던 성경공부 형태의 집회였습니다. 그래서 성공과 출세 지향적인 부흥회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교회의 방향성의 변화는 시대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고, 목사의 수도 엄청나게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의 부재가 속빈 강정 같은 현상을 양산하고 말았습니다. 이장식 박사는 예수 믿으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하는 일이 잘 된다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무엇을 왜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는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의 부재는 기독교 신앙을 천박하게 만들어 버렸고, 신앙인들 자신 역시 그 물결에 떠밀려 다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막달라인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고,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왜 우느냐고 묻자,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옮겨갔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 뒤에 주님이 서 계셨던 주님은 천사들과 같은 질문을 하셨고, 그녀는 천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때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차리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3년을 지근거리에서 주님을 따르며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절망과 슬픔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외간 남자를 똑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런 변명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진지하게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눈으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음성으로는 주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엡 2:8).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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