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02호(2020. 10. 26 월요일).
시편 시 109:5-10.
찬송 13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엄마에게 불효자가 드리는 편지> 몇 시간을 걸쳐서 뭐가 문제였는지를 확인하면서 컴퓨터 무사히 고쳤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머리만 아프실 테니, 방에 비유해서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말하자면 방에 있는 모든 가구들 다 들어내고 방청소 깨끗하게 한 다음에, 다시 원래 있었던 가구들을 제 자리 잘 넣는 거라 같다고 보시면 돼요. 그 일을 하느라 귀찮았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 시간 집중하다보니, 흙탕물 같았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엄마에게 몹시 미안해지더라고요. 에구, 이렇게 해결하면 될 것을, 왜 버럭 버럭 엄마에게 화를 냈다. 고쳐나가는 사이에 줄곧 이 생각을 했지요. 엄마,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특히나 잘 알지 못하면 아예 사용하지를 말라고 한 말, 취소 백번 취소합니다. 사실 엄마 때문에 컴퓨터가 그렇게 됐다는 증거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냥 언제나 되풀이 하는 그 놈의 실수,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은 바로 엄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실수를 또 저질렀네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정말 억정아 무너진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그러셨지요. 이런 사과 따위로 허물어진 억장이 금세 다시 회복되기는 어렵겠지만, 언제나처럼 다시 한 번만 봐 주세요. 사실 전 무엇이든 배우려는 엄마가 참 좋아요. 어려서 제가 인라인 스케이트 배울 때도 재미있겠다고 엄마도 따라 배우셨던 것도 그렇고, 컴퓨터도 그렇지요. 또래 엄마들과 비교했을 때, 엄마의 컴퓨터 실력이 아마 제일 좋을 거예요. 제가 좀 더 한가해지면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더 많은 것을 가르쳐드릴 텐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에요. 엄마, 맨 입으로 사과만하자니 좀 그래서, 저번에 부탁하신 엄마의 베스트 CD들 MP3로 한데 모아 보았어요. 이건 쉬우니까 제가 곧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드릴게요. 그럼 부디 즐겁게 감상하시면서 노여움을 풀어 주세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0월 29일 방송>a.
2. “예수와 그 어머니(25-27절)”과 “숨을 거두신 예수(28-3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는 전대미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필요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이른바 화육(化肉) 신앙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나사렛 동네의 한 정혼녀 마리아의 몸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육의 장본인인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일들은 항상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십자가 밑에 있던 네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 사이에 대화가 나옵니다. 단 두 마디의 말씀인데, 예수님의 말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와 곁에 서 있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가 바로 그 말씀들입니다.
문제는 예수께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 라고 부른 것이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귀나이(γυναι)는 귀내(γυνη)의 호격인데, 헬라어 사전을 비롯해서 개신교 신학자인 바레트(C. K. Barrett), 헨드릭슨(W. Hendriksen), 로버트슨(A. T. Robertson) 등 역시 Dear Woman에 해당하는 존칭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권위 있는 성경 킹제임스 역본은 ennoble하게 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각에서처럼 예수께서 자신의 모친을 하대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하겠습니다. 오히려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차제에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홀대하는 것에 대해서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율곡의 모친 신사임당에 대해서는 한없는 존경을 바치면서, 생모 마리아에 대해서 홀대하는 것은 신앙적인 차원은 물로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서도 결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격화하듯 지나친 존경은 경계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이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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