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53호(2022. 1. 20. 목요일).
시편 시 52:8-9.
찬송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넘지 않아야 될 선이 있는가 하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래서 수분(守分)하라고 한다. 이를 맹자는 수기(守己)하라 했다. <주역>에 나오는 존호개(存乎介) 역시 같은 말씀이다.
저마다(介) 따라 알맞게 있다(存). 뱁새는 뱁새대로 걷고, 황새는 황새대로 걷는다. 뱁새가 황새걸음을 탐하지 않고, 황새가 뱁새 걸음을 얕보지 않음이 곧 존호개이다. 사람을 제외하면 과욕(過欲)할 줄 아는 존재는 없다.
사람은 제 욕심이 지나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착하고 어진 사람은 무엇보다 과욕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래서 나아가고 싶을 때는 물러서는 경우를 생각하고 이기고 싶다면 지는 경우를 떠올려 삼간다. 신독(愼獨)하라. 홀로 있을수록 삼가라는 뜻이다. 저 잘난 척 하지 말아라. 참으로 못난 놈이 저 잘난 척하고 우쭐대는 것이다. 달리는 수레와 대적하겠다고 덤비는 사마귀를 아는가? 제 힘만 믿고 까불다 사마귀는 그만 수레바튀에 깔려 흙바닥에 납작하게 찍히고 말았다는 우화가 <장자/莊子>에 나온다. 세상에는 의외로 깔려서 납작해진 사마귀 같은 인간들이 많다. 한 돈도 안 되는 놈이 한 냥이 나간다고 허풍을 떨다 돌개바람에 먼지처럼 곤두박질치는 인간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날리는 먼지 꼴이 되지 않으려면, 저마다 알맞게 금줄을 긋고 살아야 한다.” 윤재근, <내 마음속 조용히 살아리랏다>, p. 170.
2.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1(1-15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은 한 여인과 나눈 대화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이 개선되었다는 분위기입니다만, 지금부터 2천년도 훨씬 넘은 시대에 한 젊은 남자와 이혼 경력이 풍부한 중년 여인이 단 둘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 것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도 말하기 거북한 부부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오랜 시간을 대화하였다는 점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과의 관계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문제로 서로 상종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방간의 갈등과 반목에서 찾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점이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서게 되었는데, 유다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의 세겜을 수도로 정함으로 갈등과 반목은 극으로 치닫는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같은 율법을 섬기는 백성으로써 결정적으로 시기와 질투를 넘어 상종조차 하지 않게 된 사건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북왕국이 앗수르와 결혼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방인과 혼인함으로 이스라엘인의 순수성을 훼손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 되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섯 번이나 이혼하고 현재는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여인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이혼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곤 하던 그 시절에는 이 여인은 환영받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여인은 다른 여인들과의 만남을 꺼려해서 다른 여인들이 오지 않는 한가한 시간에 야곱의 우물을 찾았고, 거기서 주님을 조우하게 된 것입니다. 대화가 길어진 것은 두 가지 경우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의 얘기를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복잡하거나 심각했을 경우로 서로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화의 내용이 진지해서 많은 주제로 확대되었을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 둘째 경우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이 두 분의 대화는 처음에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처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대화로 시작하지만, 곧 바로 영생의 물로 신앙적 주제로 옮겨지더니, 나중에는 그녀의 현실적인 문제로, 마지막으로 예배의 차원으로 발전해 갔던 것입니다. 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지 모릅니다. 말하기가 힘들 경우에도 듣기는 좋을 수 있으니까요. 너무 뻔한 주제와 내용의 설교가 아니라면, 설교를 들으러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은 희망적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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