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99(2022. 3. 7. 월요일).

시편 시 64:8-10.

찬송 5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꽃샘추위가 몰려오니 시기심이나 질투에 대한 얘기, 또 생각을 새삼 다시 해 보게 되는 데요. 한 심리학자가 시기심을 연구하기 위해, 실험 참가자들에게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친구사이인 한 명의 여학생과 두 명의 남학생이, 어느 날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인데요. 먼저 남학생 A가 두 사람에게 대학에 입학 신청서를 냈는데, 거절당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러자 남학생 B는 자신은 좋은 대학에 입학허가서를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B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자리를 떠나지요. 그러자 입학을 거절당한 A가 여학생에게 B가 잘난 척하고 우쭐댄다고 흉을 봅니다. 심리학자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 장면에서 흉을 본 A가 느낀 감정을 한 두 단어로 적어보라고 주문했지요. 그러자 가장 실험 많은 참가자들이 시기심이나 질투라는 단어를 적어냈습니다. 잘된 사람을 흉보는 일은 시기심이나 질투심으로 비쳐지는 거지요. 그런데 또 한 번의 조사에 의하면, 서로가 성취한 게 똑 같은 경우나 한 사람이 앞서서 자신의 성공을 뽐내는 경우에는, 흉보는 걸 시기심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흉보거나 비난하려면, 성취도가 비슷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뽐내는 건 시기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또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지만요, 시기심에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적개심은 상대를 그저 좋아하지 않는 비우호적인 마음과는 다른, 공격성과 파괴성을 갖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심리학자인 롤프 하우불은 충고했습니다. 그러니까 꽃 샘 추위 속에서, 이건 시기심이 아니야, 정당한 판단이야 하면서, 누군가를 흉보거나 비난하는 마음, 한 번쯤 진지하게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310일 방송>

 

2. “인사(1-9)”고린도 교회의 분열(10-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끼리끼리 논다.” 는 말처럼 같은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편이 갈리는 경우입니다. 첫째인 형님은 여동생 하나가 지지자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자칫 왕따가 될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그 여동생에게 고맙다는 선문답 같은 인사를 전합니다. 이런 끼리끼리 현상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해 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현상이 너무도 뚜렷했다 합니다. 학자들은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느냐로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가 그 내용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파는 이쪽저쪽으로 나뉘기가 싫어한 중도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합니다. 저는 이런 파벌이나 현상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도 있지만,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개신교 안에서의 수많은 파벌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각 교파가 가진 특징(혹은 강조점)으로 인해서 서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세군 교회에 가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계급장을 단 정복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를 봅니다. 순복음 교회에서는 언제나 열정 넘치는 모습을 봅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지휘계통이 잘 확립되어 있음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분열의 문제란 무엇이었습니까? 긍정적인 특징이나 강조점이 없이 소위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느냐는 인맥으로 결속된 것으로, 바람직한 분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 독실한 침례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신도인데도 불구하고 여타의 교파 목사님들보다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침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바른 번역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완전히 죄에 죽었다는 상징으로 침례가 맞다는 것입니다. 머리끝까지 물에 잠그는 침례의 의미가,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洗禮)의 의미보다는 죽음을 설명하는 게 분명하다 강조했습니다. 아무튼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당당한 신학적인 주장보다는 순전히 인맥으로 갈리게 되어, 현대 교회의 파벌 문제를 일찍부터 예고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스테파나 집안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을 기억하고 추가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가 얼마나 심했으면, 사도는 그리스도가 갈라졌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달렸거나,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현대교회의 교권싸움과 너무 닮았던 것입니다. 한국의 어느 개신교파는 총회 연혁이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수십 개로 총회장 이름만 달리하는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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