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01(2022. 3. 9. 수요일).

시편 시 65:5-7.

찬송 1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실에서 회의합시다. 회의실에 모이세요.” 이런 소리 들으면, 어떤 기분부터 드세요? 최근 한 취업 인사 포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직장인의 약 70%가 회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답니다. 이유는 회의 내용이 최종 결정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가 1. 회의가 너무 잦아서, 좋은 의견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가, 각 각 23위였어요. 그리고 회의의 제일 큰 문제점으로는, 장황하게 시간만 길어지고 결론은 나지 않는 것. 지시와 보고만 이루어지는 것. 자기 고집만 내 세우거나 준비 없이 참가하는 것. 부정적인 비판만 하는 것. 무조건 회의부터 하고보는 회의 지상주의. 이런 것들이 꼽혔지요. 그래선지 회의의 횟수를 줄이거나 시간을 줄이는 회사나 사무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콜롬비아의 후안 카르다나스라는 학자들은요, 사람들한테 자신의 이익만을 마음대로 계산해도 좋은 가상의 프로젝트를 주고난 뒤에요, A그룹 참가자들에게는 매번 모여서 그 계산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회의하게 하고요. B그룹 참가자들에게는 딱 한번만 회의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조사해 봤더니 매번 토론을 되풀이한 A그룹 참가자들한테서는, 차츰 자신의 이익 숫자와 사회적인 이익 숫자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났는데, B그룹 참가자들에게는 그런 노력이 딱 한번 그런 회의 후에만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버렸답니다. 회의를 포함해서 사람사이에 직접 만나서 의사를 전달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나타내 주는 실험 결과지요. 그 결과를 우리나라 경제학자인 최종국 교수는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100번의 이 메일이나 메신저 보다, 만나서 술 한 잔 하는 게 더 낫다.” 얼굴 직접 마주보고 하는 회의나 회식 문화 분명히 좋은 점도 없지 않으니까요. 바람직한 방향으로 잘 살릴 수 있어야 하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35일 방송>

 

2.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1-5)”하나님의 지혜(6-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2003년도에 한국의 기독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의미 있는 삶이 주어져 있음을 저자 릭 워렌은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상투적인 기독교의 감언이설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가령 나는 누구인지 궁금하고, 내가 과연 중요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 하며, 내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설교자들에게 자신의 설교가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도록 질문한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에게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목표를 세우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반도의 맨 아래에 위치한 고린도는 우상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헬라(그리스) 철학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자연히 유식한 말과 심오한 지혜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르치고 전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었다고 술회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어리석고 부끄러움의 상징인 십자가를 말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십자가는 기독교회의 상징으로 세상에 각인 되었습니다. 교회당의 종탑 끝에도, 무덤의 돌 비석에도, 그리고 사람들의 목걸이에도 십자가를 걸고 다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렴풋이나마 십자가에 대한 좋은 생각과 감정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 정도에서 멈출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이 아니라 바울 사도의 확고부동한 신념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깨닫게 된 십자가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4-5).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설명하는 유일무이한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작은 십자가를 짊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당신은 숭늉 한 사발을 들이키신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그렇고, 은퇴할 나이인데도 높은 탑에 올라가서 힘든 일을 하시는 아버지들이 그랬고,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 타지로 외국으로 방랑했던 분들도 십자가를 지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한 차원 더 높은 것으로, 우리들 인생을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려는 거룩한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이 십자가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던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설교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3. 오늘은 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로 빠짐없이 투표에 참가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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