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59호(2022. 11. 22. 화요일).
시편 시 107:10-12.
찬송 53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떠나가고 홀로 있을 때, 문득 당신의 생애가 하늘이 보내신 한 장의 연애편지 옅음을 알았노라.” 김소엽 시인은 사랑을 하늘이 보낸 한 장의 연애편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요. “답장을 보내려 해도 주소를 몰라, 내 남은 여생으로 답장을 쓰고 있다.” 사랑은 떠났어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참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우리가 사랑에 빠져서 열병을 앓는 시간은, 일생을 통해 단 몇 개월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날들은 정말 사랑에 대한 답으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처음 했던 약속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이니까요. 일상의 날들이 우리가 했던 사랑에 대한 답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루하루가 평범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11월 22일 방송>
2.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31-34절)”과 “여리고의 소경(35-43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 당하실 것,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각오하도록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른바 수난 예고는 어떤 비유 말씀 중에 살짝 끼워넣었던 말씀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설교 중간에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난 예고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분명하게 언급된 말씀이라는 점입니다(막 8:22-9:1과 평행귀, 막 9:14-32와 평행귀, 막 10:32-34와 팽행귀).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말씀을 잘 들었고 심사숙고한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골고다의 십자가를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슬프게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평소에 주님을 따르던 여자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는 대목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과 십자가의 길은 하나의 길이고, 떼어놓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길이라고 한다면, 제자들의 모든 행동들, 가령 가룟인 유다의 배신이나 도마의 불신앙, 그리고 십자가를 등진 것 등은, 충분히 사전에 납득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세 번씩이나 수난 예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진지하게 그 말씀을 묵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저는 수천 번의 설교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만족스럽게 강단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중요한 것을 빠트렸고, 강조할 곳과 조용히 지나갈 곳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집으로 향하는 교우들을 전송할 때에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그런 주일 날, “목사님, 오늘 참으로 감사합니다. 설교 말씀에서 큰 기쁨과 소망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악수를 청한 제 손을 잡아주던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죽을 쑤었다고 창피스러워하는 제게 빈 말 같지 않은 찬사와 격려를 받을 때는 큰 상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서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 하는 강조점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저마다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서 설교를 취사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사용하는 말로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점을 착안한 약은 설교자들은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을 고르려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세 번씩이나 수난 예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듣고 싶은 말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설교에서 설득력이나 기적 능력이나 번뜩이는 토론 등의 기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제 경우도 청중의 관심사는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가 될 수도 있고, 구수한 전설의 고향 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1등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시절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말씀을 깊이 곱씹었더라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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